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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분파도(대파, 중파)

광산김씨 문숙공 김주정 후 중파 해설과 분파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4. 17.

 

광산김씨 문숙공 김주정 후 중파 해설과 분파도

 

(1) 화평부원군파

 

화평부원군 김석견(金石堅)은 할아버지가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문숙공 김주정(金周鼎)이고, 아버지가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심(金深)으로 그의 서자이며, 부인은 사재령(司宰令) 최신창(崔信昌)의 딸이다.

충숙왕 때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충혜왕 때에 화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332(충혜왕 2) 적신(賊臣) 조적(曹頔) 등이 왕궁을 습격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충혜왕을 시종하여 보필한 공으로 1342(충혜왕 복위 3)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1343년 충혜왕이 민환(閔渙)의 말을 듣고 모든 부호들에게서 자색이 있는 노비를 취하려 할 때, 주리(主吏)가 가비(家婢)를 찾으러 오자 때려서 쫓아내었다. 그리고, 왕을 알현하여 서자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가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왕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니, 이에 놀란 왕이 말을 하사하고 노비 요구를 철회하였다. 아들은 수()와 서자인 완자첩목아가 있다.

화평부원군파는 17세부터 20세까지 분파 없이 독자로 이어 오다가 21세에 도승지참판공 김호와 한성좌윤공 김후로 분파되었다.

 

(2) 삼사좌사공파

삼사좌사공 김승사(金承嗣)는 문숙공 김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14세 충숙공 김심이고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왕씨(王氏)이다. 충목왕(忠穆王)때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대원(大元)에 들어가 토적(土賊) 이홍성(李弘成)등을 토평(討平)하였다. ()는 실전되어 나주군 공산면 삼장산에 설단하였다.

공은 상호군 밀직부사공 김정을 두었고, 김정은 상장군 김종연을 두었으며, 김종연은 병마절도사 김백균, 부사공 김맹균, 공조참의공 김종균, 호조참판공 계균 등 4형제를 두어 자손이 번성하였다.

22세 김숭조(金崇祖)는 증조가 동지밀직사사 백균(伯鈞)이고, 할아버지는 진()이며, 아버지는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충손(衷孫)이다. 1480(성종 11) 진사가 되고 1495(연산군 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가 되고, 이어서 정자를 거쳐 1501년 정언(正言), 1504년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 아래에서 벼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청맹(靑盲)’이라 일컫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사예(司藝)로서 문과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고, 이어 헌납(獻納)에 기용되어 민간의 가사(家舍)를 탈취한 권령(權齡), 수령으로 재임 때 남형(濫刑 : 지나친 형벌을 내림)과 징렴(徵斂 : 세금을 거둬들임)을 일삼은 박세준(朴世俊), 가동(家僮)을 보내어 외방 수령을 징색(徵索 : 세금징수를 위한 수색)한 정세명(丁世明) 등을 추국(推鞫: 신문)하여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 시폐를 논하고 정지(定志중작(重爵납간(納諫절용(節用친현사(親賢士원참녕(遠讒侫흥학교(興學校정사습(正士習억환자(抑宦者보외척(保外戚명상벌(明賞罰휼민(恤民) 12조를 헌의(獻議: 왕에게 건의함)하였다.

그 해 사예(司藝)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대한 논상(論賞 : 상에 대하여 논함)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515(중종 10) 집의(執義), 이듬해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전 국회의원 김효석의원이 사간공 김숭조의 후손이다.

(3) 상호군파

상호군공 김승진(金承晉)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할아버지는 문숙공 김정이고,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이며 어머니는 진강군부인(鎭江郡夫人) 노씨()이다. 벼슬은 상호군(上護軍)이었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책봉(冊封)되었으며 공검 충직으로 칭송(稱頌)이 있었다.

공은 중추원사공 김적선, 시중공 김덕선, 감사공 김종선 등 세 아들로 두어 세 갈래로 분파된다. 상호군의 큰 아들 손에서 19세 금위사정공 김사우와 현감공 김사하로 분파되었다. 상호군의 셋째 아들 김종선에게서 20세에 상주목사공 김영보, 김영진, 교위공 김영호 3형제로 분파되었다.

 

(4) 예조판서공파

예조판서공 김승노(金承魯)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충숙공(忠肅公) 김심(金深)이다. 우왕(禑王)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냇다. ()는 실전되어 평장동에 사우(祠宇)가 있다.

공은 예조판서공파의 파조이다. 공은 좌찬성공 김방을 낳고, 김방은 관찰사공 김문발을 낳고, 김문발은 사인공 김추정을 낳고, 김추정은 직장공 김학례를 낳았다. 직장공 김학례에서 비로서 정읍현감공 김원, 안동도호부부사공 김거, 현감공 김경으로 분파되었다.

 

(5) 밀직사사공파

밀직사사공 김중간(金仲幹)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할아버지는 문숙공 김정이고, 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이다. 벼슬은 상호군(上護軍)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였다. 밀직사사공파의 파조이다.

공은 병마절도사공 김덕룡과 사의공 김덕봉을 낳아 분파되었고, 김덕룡부터 19세 예문관응교공 김효충까지 외아들로 내려오다 20세에 진사공 김신원, 남양훈도공 김신형, 승의랑공 김신정으로 분파되었다. 김진원은 세 아들을 두어 분파되었고, 김진형과 김진정도 각각 두 아들을 두어 크게 자손이 번성하였다. 다른 한편 17세 사의공 김덕봉의 손은 외아들로 21세까지 내려왔다.

 

(10) 판도판서공파

판도판서공 김윤장은 태학사 문하시중공 김류의 아들이며, 밀직사사공 김중간의 동생으로 판도판서공파 파조이다. 판도판서공파는 18세에 영호군공 김남호와 찰방공 김남렴으로 분파되었고, 김남호는 감찰공 김중노, 부사공 김선노, 지중추공 김숙노, 김흥노, 진사공 김계노 등 5형제를 두어 4파로 분파되었다. 김중노는 광산부원군 김맹권, 진사공 김공권, 김종권을 두어 세 파로 분파되었다. 그리고 광산부원군 김맹권은 좌통례공 김극진, 우의정공 김극성, 순창군수공 김극양을 두어 세 파로 분파된다.

김맹권은 호가 만취당(晩翠堂)이고 일찍이 진사가 되고 문명이 높아 집현전학사로 뽑혔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뒤에 단종이 된 왕세손의 보필을 부탁받았으나, 1455(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자, 그날로 고향으로 돌아가 끝내 과거를 보지 않았다. 그 뒤 1490(성종 21) 직첩을 되돌려 받았다.

김극성은 1496(연산군 2) 생원시에 장원하고, 1498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전적에 임명되어 종학사회(宗學司誨)를 겸하였다. 1500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얼마 뒤 헌납에 발탁되었으나 연산군에게 충심으로 간하다가 죄를 입을 뻔했고, 이어 병조정랑·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어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임명되었다. 이듬 해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빌려 서천군수로 부임하였다.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병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의주목사로 갔다가 1518(중종 13) 삼공(三公)에 문무 겸비의 인물로 천거되어 예조참판으로 전임되었다. 다시 경상우병사·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이듬 해 공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1523년 예조판서·우참찬·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잠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 세자이사로 있다가,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그 일파의 모함으로 1531(중종 26)정광필(鄭光弼)과 함께 흥덕(興德)에 유배되었다. 이듬 해 김안로가 죽자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비교적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고 자세했으며, 세 번이나 예조판서를 지낼 만큼 문학에 뛰어났고 간결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하였다. 저서로 우정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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