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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분파도(대파, 중파)

광산김씨 문정공 김태현 후(後) 중파(中派)의 해설과 분파도

by 仲林堂 김용헌 2015. 4. 17.

광산김씨 중파(中派)의 해설과 분파도

 

 가. 문정공 김태현 후손

 

(1) 의량공파

의량공 김광식은 문정공 김태현의 큰아들이며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1178(명종 8) 조위총(趙位寵)의 난 이후 민심이 흉흉해진 서경지역을 응징하기 위해 서경의 관제를 고칠 때, 대장군으로 서경제치사(西京制置使)에 임명되었다. 좌산기상시를 거쳐 1181년에는 전중감(殿中監)이 되고, 이어 추밀사를 역임했다.

의량공은 아들 해령별장공 김승조를 두웠고, 해령별장공은 진주목사공 김옥연과 목사공 김옥하로 분파된다. 18세 김옥연은 19세 김효진, 20세 김모로 대를 이어 오다 21세에 참봉공 김석공, 현감공 김석후, 주부공 김석백, 절제공 김석남 등 4파로 분파된다.

(2) 문민공파

문민공 김광철(金光轍)은 문민공의 파조이며 호는 둔재(鈍齋)이고 아버지는 중찬(中贊)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이고 의량공 김광식의 동생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44(충목왕 즉위년) 6월에 서연(書筵)이 베풀어지자 지신사(知申事)로 시독(侍讀)하였고, 1347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판사가 되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문민공 시호를 받았다.

문민공파는 해양군 김회조와 별장공 도탁으로 분파되었다. 17세 해양군 회조는 첨과 우 두 아들을 두어 분파되었고, 18세 참지정사공 김첨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진사공 김가고와 군수공 김자경을 두어 분파되었다. 별장공의 아들 광성군 김계지(金繼志)6형제를 두었으며 모두 벼슬이 높았다. 광성군 김계지의 6형제 아들 중 첫째 광산군 김재와 둘째 미당공 김심에게서 자손이 많았다.

광성군 김계지는 1403(태종 3) 상호군으로서 경상·전라·충청도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병선을 점검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근무상황을 규찰하였다. 같은 해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키자 안변에 파견되어 교서를 반포하고 민심을 위무하였다. 1406년 좌군총제(左軍摠制) 재직중 조사의의 난 평정에 기여한 공으로 군공 1등에 등제되면서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고,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

1407년 삼군총제서로 명나라에 관마진헌을 위한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이 설치되면서 그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408년 전라도도절제사 때에 천거한 만호 박광계(朴光桂허승량(許承亮)이 탐관오리로 죄를 받게 되자 천거의 책임을 추궁당한 뒤 면직되었다.

그러나 곧 풍해도(지금의 황해도) 병마도절제사 겸 판해주목사에 기용되었고, 1409년 전렵군(田獵軍)의 수를 가정(加定)하고 자제패(子弟牌)를 만든 뒤 이들의 부방(赴防)을 면제하게 한 일로 다시 면직되었다.

그 전국에 걸친 11도병마도절제사의 설치와 함께 다시 강원도병마도절제사에 서용되었으며, 1410년에 사직하였다. 무예에 능하였고,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경·외의 군정에 기여한 바 많았다.

(3) 문간공파

문간공 김광재(金光載)는 문정공 김태현의 둘째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간공 시호를 받았다. 문간공은 큰 아들 군기감공 김흥조와 작은 아들 김윤조를 두어 분파며 20세까지 두 파 모두 외아들로 손을 이었고, 20세 부사직공 김계충은 두 아들을 두어 분파되었다.

문간공 파조 김광재는 자는 자여(子輿), 호는 송당(松堂). 중찬(中贊) 태현(台鉉)의 아들이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해 성균학관이 되었다.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공로로 사복시승(司僕寺丞)에 승진했고, 이어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1339(충혜왕 복위 1)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호종하였다. 고려에 돌아와서 군부총랑(軍簿摠郎)이 되고,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올랐다. 이 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이군준(李君俊)과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대신들이 아부하지 않는다고 모함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전임되었다. 그러나 곧 밀직부사·제조전선(提調銓選)을 지내고, 지사사(知司事)에 승진하였다. 1349년 충정왕이 즉위하자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그 사부(師傅)가 될 것을 요청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어 인사권을 맡았으나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정사 간섭이 심해 물러났다. 그 뒤 덕녕공주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1350(충정왕 2)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는데, 이 때 정방(政房)에서 문선(文選)과 무선(武選)을 총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건의해 이를 시정하도록 했으며,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직하였다.

 

(4) 록사공파

록사공 김광로(金光輅)는 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개성군대부인 왕씨(開城郡大夫人王氏)로 증호부상서(贈戶部尙書) 정조(丁朝)의 딸이다. 공은 1317(충숙왕 5) 문과에 급제하여 가안부 녹사(嘉安府錄事)를 지냈으나 요절했다.

녹사공은 경상병마절도사공 김순조를 낳고, 김순조는 삼척부사공 김조를 낳고, 김조는 전라병마절도사공 김정무를 낳았다. 김정무는 김방영, 김숙진, 김중윤, 김여정 등 4형제를 두어 크게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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