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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해석

김준룡 장군의 전승지 및 안내판 수정 요청

by 仲林堂 김용헌 2014. 2. 6.

 

김준룡장군의 전승지 및 안내판은 수원 광교산 비로봉 약 100미터 못 미처에 등산로 입구와 전승지 바로 앞에 세워저 있다. 나는 이 안내판의 관할 소속이 경기도청으로 아래와 같이 건의서를 2013년 12월 8일 보냈습니다.

 

김준룡장군 전승지 및 비안내판 수정을 요청합니다.

 

1.간판의 이름이 라는 일본식 표현이 들어가 좋지 않습니다. 그냥 로 표현하는 것보다 바위에 새겼으므로 암각비(岩刻碑)가 좋을 것 같습니다.

김준룡장군 전승지(戰勝地)와 암각비(巖刻碑)

 

2.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청나라 군사를 물리쳤던 김준룡(1586-1642) 장군의 전승지에 비 모양으로 새긴 글이다.”에서 비 모양으로 새긴 글이라고 하여 어떤 연유인지 비가 어떤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곳은 173715-7일 인조 병자호란 때 전라병사 김준용 장군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청나라 양굴리 군사를 물리 친 곳으로 김장군의 승전 사실을 바위에 새긴 곳입니다.

 

3. “김준룡 장군은 원주김씨로 조선 광해군 원년(1609)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처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렀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다음과 같이 수정을 건의합니다.

김준룡 장군은 광해군 원년(1609) 무과에 급제하였고, 1736년 인조임금이 피신하여 계신 남한산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오라는 명을 받고 173714일 선봉장으로 군사 2,000명을 이끌고 광교산 비로봉에 진을 치자 이에 청군 양굴리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청군양굴리는 3번을 공격했으나 패퇴하고 말았으며 고창출신 군사 박의가 쏜 포에 맞아 즉사하였다.

 

4. “그곳에서 격전을 벌린 끝에 청태종이 사위이며내용이 틀리고 격전을 벌린 끝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 보다는

적장 양굴리는 청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로 후금 건국 시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공이 있는 자로"

 

5. 청태종청 태조

 

6. 적장 양고리등의 목을 베었다로 쓰였으나 적장의 이름은 양골리가 맞고 포탄에 맞아 죽었으므로 베었다는 틀립니다.

양고리양골리

목을 베었다포탄에 맞아 죽었다.

 

7. “세상을 떠난 후”--->1792929

 

8. 영의정에 추증(돌아가시고 벼슬을 받으면 증직이라고 합니다).

영의정에 증직

 

9. 충숙충양

 

10. 시호도 붙어졌다(시호는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임금이 내리는 이름으로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시호를 받았다.

 

11. “전하는 말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바랍니다.

수원성을 축성할 때 수원부사인 채재공은 석재를 구하러 광교산으로 보냈던 사람들로부터 김준룡장군의 승전 이야기를 듣고 비문을 새겨 넣으라고 명했다고 한다.”

 

12. 암각한 글씨는 중앙에

忠襄公金俊龍戰勝地(충양공 김준용장군의 승전지), 그 좌우에 勤王至此殺淸三大將(임금을 지성껏 섬겼고 청나라 3명의 대장을 죽었다. 섬기, 丙子淸亂公提湖南兵(병자청난에 호남병사를 이끌고 왔다)라고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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