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문해석

보은 선병국 가문의 효열비, 시혜비, 송덕비

by 仲林堂 김용헌 2014. 8. 4.

고흥 부자 선영홍은 유명한 지관으로 하여금 길지를 찾게 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인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번지를 찾았고,  이곳에 1909년부터 시작하여 1921년 99칸 집을 완공하였다. 99칸 외에서당 30칸을 별도로 지었다고 한다. 방앗간까지 있었다고 하니 당대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 한 사람이 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선영홍의 증손자인 선병국이 살고 있으며 이 가옥의 이름을 선병국가옥이라고 하고 있다.

 

이 가옥은 99칸의 큰 가옥일으로 유명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효자와 열녀가 같이 있는 효열문이 있다는 것이다.  남편 선처흠은 효자이고, 선처흠 처는 열녀이니 이런 부부는 조선팔도에 전후무후 할 것 같다. 효열문도 대단한 것이지만 거기에 선처흠의 아들 선영홍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는 시혜비가 있고, 선영홍의 아들 선정훈도 송덕비까지 있으니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누렸다고 하겠다. 

 

세상에 대를 이어 부와 명예를 다 쥘 수 있을 가? 의문도 없지 않다. 이들이 활동한 시대가 일제의 강점기이기 때문이다. 선처흠의 아들 선영홍의 시혜비에 선영홍의 관직이 전비서이다. 누구의 비서일가?  찾아 보아도 알 수 없었으나 일본인의 비서가 아닌가 의심이 갔다.

 

송덕비이나 시혜비가 권력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 하는 의문도 있지만 선처흠의 손자 선정문은 이곳에 30칸 서숙에서 유명한 선생님을 초빙하여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를 모아 숙식을 제공하면서 한문학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임창순 선생 등 학자를 배출한 공로는 높이 사야 할 것이다.  

 

[선처흠의 효열비: 3번째 사진] 내용 풀이

孝子 (효자)

贈朝散大夫 童蒙敎官 宣處欽之門 (증조산대부 동몽교관 선처흠지문)

증직 조산대부 동몽 교관인 선처흠의 문 : 조산대부는 벼슬의 품계로 고종 때눈 문관을 조산대부라고 불렀다. 실제 벼슬은 못하였으나 예를 갖춰 준 가장 낮은 계급의 품계라고 본다. 증은 실제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사후에 명예로 주었다는 것이다. 동몽교관은 서당의 선생님이고, 선처흠지문은 선처흠의 문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선처흠은 아버지가 안질로 어려울 때 매고기를 드려 치료하였다고 한다.  

烈女 (열녀)

宣處欽妻 令人 慶州金氏之門 (선처흠처 영인 경주김씨지문)

영인은 선처흠처의 품계이다. 경주김씨의 문이라는 뜻이다.  

高宗2910月 日 고종29년(서기 1892년) 10월에 세웠다.

命旌 戊辰12月 日立 정려를 명한 것은 무진년 (서기 1868년) 12월이다.  

참고로 선처흠의 처는 남편이 위독할 때 자신의 넙적다리를 베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여러 날을 연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선영홍의 시혜비: 4번째 사진] 내용 풀이

철탑에 다음과 같이 한자로 새겼다.  

分人以田 사람들에게 밭을 나눠주고

惠澤均等 균등한 혜택을 줬으며

自當稅金 스스로 당연히 세금을 내야함을

耕者不知 경작자는 알지 못했다. 

 

前 秘書卿 宣公永鴻 施惠碑 전 비서 선영홍공의 시혜비석

 

穀救太輕 곡식을 얻기 어렵지 않았고

俾民無飢 가난한 사람도 굼지 않았고

富以好仁 부가 좋은 인으로 되니

捨公其誰 그 누가 공의 나눠줌을 알 수 있으랴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 5번째 사진] 내용 풀이 

南軒 宣政薰 先生 頌德碑 호는 남헌이고, 이름은 선정훈, 송덕비는 "덕을 베풀어 칭송한다"는 비석이다.

 

[위선최락 현판: 7번째 사진]

 爲善最樂(위선최락) 朱熹(주희)

주희는 남송 때의 유학자로 주자라고 부른다. 주희가 한 말로 위선최락은 "선을 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위선최락 현판은 사랑방과 안채에 걸려 있었다.

효열문 건물 크기도 크고 담장도 높다.

 

효열문의 공포(栱包)가 아주 화려하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포(多包) 형식이다.

 

효자와 열녀의 정려이다. 좌측에는 효자 선처흠의 문이라고 썼고, 우측에는 열녀 선처흠의 처 경주김씨 문이라고 썼다.

 

선처흠의 시혜비이다. 당시에는 철이 귀하여 돌보다 비싼 철로 비철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글자는 양각을 하였다. 철판에 양각으로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 내용은 앞에서 풀이하였다.

  

남헌 선정훈 선생의 송덕비다.

 

 

 사랑채에 걸린 爲善最樂(위선최락)이란 현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