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균관

명륜당 구경

by 仲林堂 김용헌 2013. 7. 29.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이 글을 배우고 익혔고,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다. 1398년(태조 7)에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북쪽에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곳에서 조선 말엽까지 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이 배출되었고, 국민의 도의정신과 사회정의를 부식(扶植)하고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또한 고전정신을 북돋워 새로운 역사 창조의 바탕을 마련한 곳이며, 경전 이해도를 측정하는 시험이나 소과(小科)·대과(大科)를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성균관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후기에 126명으로 조정하였고 말기 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원에 미달될 경우에 한하여 생원ㆍ진사가 아니더라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와 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본과생(上齋生:上舍生)이나 기재생(下齋生:別科生)도 과거에 급제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출세할 수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던 곳이 명륜당이다. 전국에서 200명이 선발되었다고 하니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은 지금으로 보면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추녀 밑 <명륜당(明倫堂)>이란 글씨는 1606년(선조 39)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쓴 것이다. 연호도 대명이라고 하여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였고, 명나라 연호인 만력 병오년이며, 맹하는 초여름이란 뜻이다.

명륜당 내부는 현판이 많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있는 분들은 석전에 집사나 헌관으로 옷을 이곳에서 갈아 있고 있었다.

대부분 판액은 동춘당 송준길이 썼다.  

명륜당 앞쪽에 서편에는 서재와 동편에는 동재가 있다. 이곳은 동재이다. 서재와 동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이다. 동·서재는 명륜당 동서로 있는 장방형의 건물로서 2간(間)이 한 방으로 되어 있는데, 동·서재를 합하면 총 28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후, 현대에 와서 재 건축 과정에서 방의 숫자를 32개로 늘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칸에 방하나로 총 방수가 28칸이다. 방28개에 200명이 기숙을 했으니 방한칸에 8명이 들어가야 한다. 방 크기로 볼 때 4명씩 엇갈려 누어야 겨우 될 정도이다. 요즘에 와서 그 정도의 크기에 잠을 자려면 2-3명이 될 것 같다.

서재이다.

천연기념물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는 아래 간판에 있듯이 1519년 대사성 윤탁이 심은 나무이다.

 

금번 석전의 도집례인 권오흥 인간문화재와 인사를 나눈 후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도집례는 본 행사를 지휘한 총 사회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