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죽주산성(竹州山城) 답사

by 仲林堂 김용헌 2024. 11. 11.

죽주산성 휴게소 근처 산성 입구에 있는 죽주산성 안내 글이다.
북문과 그 좌우에 산성이 보인다.
산성은 돌로 잘 쌓았다.
북문이다. 잘 다듬은 사각형 큰 돌로 쌓았다. 천정에 놓은 돌은 아주 크다.
우리 일행이 북포로로 가고 있다.
성벽 위를 지나고 있다.
제법 높은 성벽이다.
북포루에 도착하면 넓은 평지가 있고, 포루 옆에 큰 고목 한 그루가 있다.
북포루 초석이다.

 

북포루에서 내려다 본 죽산면 일대 모습이다.
성안에 있는 연못이다.

 

(사)화성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11월 9일 15시 30분 죽주산성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은 안성에서 장호원으로 가다가 죽산에서 백암으로 가는 17번 국도 변에 비봉산이 보인다. 이 산성은 비봉산 서쪽에 위치해 있다. 본성이 1.7km, 외성이 1.5km, 내성이 270m로 3겹 성으로 되어 있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서 아래와 같이 이 산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주산성은 초축 성벽을 일부 공유하며 고려, 조선시대에 계속 수축되었다. 초축성벽은 산 정상부에서 능선을 따라 곡간부를 감싸도록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둘레는 1,322m로 삼국시대 성곽 중 대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정지하고, 내벽과 외벽 및 속채움까지 모두 돌로 쌓았다. 성돌은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바른층쌓기 방식으로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외벽에는 보축성벽을 덧붙여 쌓았다. 이러한 축성법은 죽주산성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 신라가 쌓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려 고종 23년(1236)에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공격하자 죽주방호 별감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을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 때에 삼국시대에 초축된 성벽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때 변이중·황진 장군의 부대가 이 산성에서 싸워 승리했다. 임진왜란 후에도 수축이 이루어졌다. 이때 왜성의 축성법이 일부 적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벽의 외벽경사가 완만해지고, 특히 남치성은 모서리에 대석이 사용되는 등 왜성의 축성법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곽의 곡륜(曲輪)을 특징으로 하는 왜성의 평면배치 양상이나, 독특한 성문의 구조 등은 적용되지 않았다.

죽주산성은 여러 시기의 축성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축성기술사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죽주산성 입구에서 승용차로는 중턱까지 갈 수 있지만 버스가 다니기에는 좁은 길이라 걸어서 올라갔다. 버스에서 하차 후 13분만에 북문(?)에 도착했고, 북문부터는 성벽 위로 난 길을 6분 걸어서 넓은 터가 있는 북포루에 도착했다.

 

북문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성벽 돌을 보고는 여기는 새로 꾸미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근래 성벽을 보면 원래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새로 심하게 수축(修築)하여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실망이 태반이다. 

 

북문부터는 우측으로 성벽 위로 따라 5~6분 오르면 넓은 공터에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있고, 북포루의 기초석이 원래 모습대로 있다. 북포루 초석은 사람 가슴 높이로 높으면서도 사각 수평으로 잘 쌓아 일행 중에서  그 초석 위에서 포즈를 취한다. 

 

하산하면서 송문주 장군의 몽골군을 물리친 이야기 게시판이 있다. 송문주 장군에 관하여 나무위키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231년 제1차 여몽전쟁 때 귀주성 전투에서 박서의 밑에서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후 제3차 여몽전쟁 때인 1236년 죽주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귀주성의 전투로 몽골군의 전투 방식을 파악한 송문주는 죽주산성 전투가 시작 되자 투석기를 준비 시킨다.

몽골군이 발석거를 준비 하는데 배치를 끝내자 마자 죽주산성의 고려 투석기로 몽골 투석기를 격파 시켜 공성을 좌절 시키며 15일 간 막아냈다.

송장군묘비명에 몽골군은 죽주산성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자 멀리와서 배고플테니 생선으로 군량으로 먹으라고 잉어를 보내자 몽골군이 당황하여 후퇴하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채제공이 기록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등청정은 한양 공격을 하였고, 가등청정 부하 4,500명이 이 성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홍계남과 변이중이 이 산성을 탈환하고자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안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방장 황진(1550~1593) 장군이 공격하여 성을 탈환하였다고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