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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향교

홍주향교 탐방

by 仲林堂 김용헌 2023. 6. 19.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지산 김복한 등 항일운동가의 고장은 홍주와 결성이다. 이 지역은 항일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다. 일제는 1914 항일 세력의 본산인 홍주와 결성지역의 이름을 지우기 위한 속셈으로 홍주군, 결성군, 보령군의 일부를 합하여 홍성군(洪州郡)을 새로 만들었다. 원래 고을 이름인 홍주와 결성은 홍주향교와 결성향교에 남아 있다. 홍주는 1358년 목으로 승격된 적이 있고 그 후 군으로 격하되었지만, 역사가 깊은 고을이다.

 

우리 일행은 백종원 국밥으로 유명한 예산시장에서 국밥을 먹고 차로 30분을 달려 홍주향교에 도착했다. 사전에 홍주향교 전교 님에게 연락은 했으나 출입문은 닫혀 있었다. 요즘 많은 향교나 서원에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다 보니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이 닫혀 있으니 찾는 사람도 없고, 찾는 사람 없으니 문을 닫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담이 높지 않고 안내도가 잘 되어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담 넘어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다. 비록 안내자가 없지만, 향교의 건물배치는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어 바로 보고 알 수 있었다.

 

향교는 조선 시대 공립학교로 고을마다 하나씩 있었다. 향교가 있는 곳은 그 고을의 관아가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부분의 향교는 구도심에 있다 보니, 보전에 쉬지 않았던 것 같다. 향교 주변이 크게 발전했으나 향교는 그대로 남아 있어 옹색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곳 홍주향교는 도심과는 꽤 떨어진 한가로운 곳에 있으며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의 위치가 홍주의 북쪽 3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로 추측된다고 보고 있다.

 

홍살문에서 외삼문으로 가는 길도 좌우로 고목이 찾는 이에게 유구한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외삼문 또한 반듯하게 생겼다. 비록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서 보지 못하고 담 넘어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향교의 구색을 잘 갖추고 있었다. 저 안 가까이서 보면 명륜당과 대성전은 어떨까? 궁금증을 자아냈다.

 

명륜당의 굵은 기둥, 편안한 모습으로 내려앉은 맞배지붕, 큼직한 현판이 하나같이 당당한 모습이다. 명륜당과 나란히 있는 5칸의 전사청도 훌륭하다. 제사 준비를 하는 곳이 이 정도라면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제례를 올리나 짐작이 간다.

 

내삼문을 지나 대성전이다. 비록 정면 3칸의 건물이지만 품격 높은 자태고, 규모도 크다. 정면 3칸 대성전 중에서 여기 홍주향교 대성전만큼 훌륭한 대성전도 드물 것 같다. 단지 아쉬운 것은 담 너머로 보아 정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점이다.

 

그 외 제기고도 있다. 그리고 손을 씻는 관수대와 밤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도 있다. 나는 처음 향교 안내 간판에 있는 '청료대'란 것을 처음 보고 궁금했다. 청료란 뜻을 알고자 한문이 있나 찾아보았지만, 어느 곳에도 '청료'라는 단어는 홍주향교 이외는 없었다. 구글 검색을 하니 정료대(庭燎臺)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정료대는 원래 사찰, 서원 등에서 야간 행사가 있을 때 관솔 지나 송진 등을 태워 경내를 밝히던 것으로 노주석 또는 불우리라고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찰에서 정료대가 남아 있는 예는 회암사지와 해인사, 봉암사, 대승사 등이 있으며, 조선 시대 향교나 서원에는 다수의 정료대가 남아 있다." 불을 밝히는 용도와 그 이미지도 볼 때 정료대가 맞는 것 같았다. 청료대는 오기이고, 정료대라고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홍주향교는 나무랄 곳이 하나 없는 향교의 모습이다. 이렇게 훌륭한 향교를 널리 알려야 하지만 평소에 문을 닫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홍살문이다. 홍살문 우측편에 칠의비각이 일부 보인다.
홍주향교 안내표시판이 훌륭하다. 11번 청료대를 정료대로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멀리서 본 외삼문이다.
가까이서 본 외삼문이다. 우측문으로 들어가고 좌측문으로 나온다. 가운데는 신문으로 제례 때만 연다.
좌측이 유생들이 공부하는 명륜당이고, 우측은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다. 많은 향교가 전사청이 없으나 이곳 홍주향교는 전사청이 훌륭하다.
명륜당이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준수하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제사 기구를 보관하는 제기고이다. 은행나무 한 그루가 명륜당 묘정에 서 있다. 제기고와 동무 사이 묘정에 손을 씻는 관수대가 보인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석물은 밤에 불을 밝히는 정료대이다. 나는 청료대(庭燎臺)를 처음 이곳에서 본다.
공자와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다. 그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해방 전까지는 우리나라 18현을 모셨고, 대성전에는 중국 5성위, 10철, 중국 72현을 모셨으나 해방후 대성전에는 중국의 10철을 포함한 현인의 위패를 땅에 묻고 5성위와 우리나라 18현을 대성전에 모셨다.

홍주향교 앞에는 또 하나의 의로운 고장답게 칠의비(七義碑)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비는 홍주향교 유생들이 1894년 동학난에 홍비들이 벌떼처럼 쳐들어와서 일곱 유생을 묶어서 끌고 나와 불에 태워 죽였다. 이들의 희생으로 성묘(聖廟)는 무사했다고 한다. 이 일을 묻혀서는 안 된다고 여겨 이장노(李莊魯) 전교와 장의 들이 이 비를 세웠다. 비석 전면에 큰 글씨로 "七義碑"라고 쓴 글씨가 불의에 목숨 바친 강직한 정신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비문은 하준환 군수가 찬했다. 7인은 오경근, 최민지, 방세응, 박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혁신이다.

칠의비와 비각이다.
비석 전면이다.
비석 후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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