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수의과대학 학생들이 1965년부터 1983년까지 수원 서부지역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중등과정을 운영하였다. 서둔 야학은 1954년 서둔교회에서 설립한 성경구락부로부터 시작되어 탑동 마을회관, 농사원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1965년 당시 농학과 학생이었던 황건식 등이 야학교사들이 성금을 모아 이곳에 부지를 구입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직접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하였고, 책상과 걸상을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매년 10-2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었다. 이 학교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로 261-90 수원시민농장 후문 주차장 옆에 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황건식 선생은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에서 "시설이 너무 열악해 선생님들(대학생들)이 모금해 교사를 짓기로 했다. 시멘트를 사다 직접 벽돌을 찍어 소달구지로 나르고, 나무는 학장을 졸라 농대연습림에 있는 나무를 베어 시내 제재소에서 잘라 썼다. 처음에는 8만원이면 교사를 지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지만 23만원 들었다.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1만원 정도였다.”라고 증언했다.
1965년 이 학교에 입학한 박애란씨는 "사랑은 하나 그림움은 둘"이란 서둔야학의 감사에 보답한 책에서 "한분 한분이 서울대학생들인 서둔 야학 선생님들은 내게 최상의 교재였다. 사람을 좋아하고 호기심과 탐구심이 강한 내게 서둔 야학은 최상의 교육 환경이었다. 철학이나 문학 또는 음악 등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나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선생님들께 쪼르르 달려가서 내 궁금증을 해결하곤 했다. 몇십분의 서둔 야학 선생님들은 내 개인교수 역할을 충실히 해주셨다."라고 말했다.
순수 야학운동은 유신정권 이후 민중야학으로 변했고, 서울 농대는 수원의 핵심운동권이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며 위기를 맞았다. 1980년 5월 17일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7월 30일 과외금지법에 따라 야학도 금지되었고, 야학선생님들이 연행·구속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50여년 이어지던 서둔야학은 1000여 명의 학생, 300여 명의 선생님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건물은 ㄴ자형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기와집으로 보이나 실제는 얕은 프라스틱 재질의 지붕이다. 1965년 건물로 오래되었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는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일부 처마 천정이 부서져 있었다. 철조망 울타리가 처 있고, 출입문은 열쇄로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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