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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영신연와(永新煉瓦)

by 仲林堂 김용헌 2022. 6. 1.

공장 입구에서 본 모습이다.

 

앞은 다른 회사의 마당이고 지붕이 있는 곳부터 영신영와 건물이다.

영신연와는 수원의 유지로 알려진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에 박지원씨가 1973년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887-19에 세운 빨간벽돌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그는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에 1975년 영신여고를 세웠다. 영신연와는 당시 동보연와(현재 태산아파트 자리)와 경쟁하며 연간 1,000만장 붉은 벽독을 찍어냈다. 1990년대 고층아파트 도입으로 구조재와 마감재가 변화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20년간 영화를 뒤로 하고 1993년 문을 닫았다. 그 후 30년간 높이 솟은 굴뚝만 그 모습 그대로이지만, 지금 그 형체도 알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가 되어 있다. 공장안으로 접근할 수 없게 폐건축 자재가 쌓여 있다. 

 

수원일보 금년 3월 15일자 정준성 기자의 기사를 보면 "영신연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마지막 호프만식 가마다. 독일의 기술자 프리드리히 호프만(1818~1900)이 고안해 명명된 ‘호프만식 가마’는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벽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긴 타원형으로 가마를 배치해 예열과 소성(燒成), 냉각, 요적(窯積) 등 벽돌생산 과정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길이 62.5m, 폭 13.7m, 높이 3.2m 규모의 영신연와 가마도 이와 같은 방식이 적용됐다. 총 22개의 가마입구가 있어 각 가마별로 벽돌을 쌓고, 예열을 하고, 1200도씨 이상으로 굽고, 다시 열을 식혀서 벽돌을 빼내기까지의 과정이 순환돼 매일 5만장 이상의 벽돌이 생산됐다.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3교대로 가루석탄을 공급했으며,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위해 노동자들을 위한 사택도 제공됐다. 우리나라에 영신연와와 같은 호프만식 가마는 수십여곳에 달했으나 2020년 기준 3곳만 현존한다. 이 중 한 곳은 터널식으로 개축해 호프만식 가마를 확인할 수 없고, 다른 한 곳도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가마와 사택이 모두 남아 있는 곳은 영신연와가 유일한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기술했다.

 

공장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스레트 지붕에 빨간벽돌로 지은 종업원들의 사택이 4동이 그대로 남아 있다. 1동에 12가구가 거주하여 총 50가구가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대부분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80년대 굴뚝에서 연기가 끊이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이곳 공장은 드넓은 들판에 공장은 어느 곳에서나 눈에 잘 띄었으나 아직도 주변은 농지로 남아 있지만 그 공장의 남쪽에는 고색중학교가 들어 섰고, 중고차회사에서 빈틈이 없을 정도로 공간만 있으면 주차를 해서 예전과 달리 한가롭지 않다.

 

영신연와를 수원의 근대문화유산으로 지키자는 작품 전시회도 있었지만 있지만 훼손이 너무 심하고 사유지라서 보존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영신연와 공장으로는 담이 있어 들어 갈 수 없다.
뒤돌아 북쪽에서 본 영신연와 건물 모습이다. 가운데 아취형으로 보이는 곳이 불을 피웠던 가마로 보인다.
붉은 벽돌 넘어로 진입할 수 없어 볼 수 없었다.
담 넘어로 본 굴뚝과 무너진 공장 모습이다. 공장 주변에 건축 폐기물이 가득하다.
굴뚝은 다른 건물에 비하여 온전한 편이다.
붉은 벽돌 사이로 아취형 벽돌이 보이는 곳이 가마 입구 같다.
멀리서 본 영신연화 모습이다.
굴뚝을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마이크도 난간에 보인다.
근로자들이 살았던 사택이다. 지금은 빈집으로 보인다.
이곳 사택에는 깨끗한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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