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 양간공(휘 金璉) 사우(祠宇) 숭덕사(崇德祠)와 재실 숭모재(崇慕齋)

by 仲林堂 김용헌 2022. 4. 2.

광산김씨양간공 김연(金璉)은 광산김씨 14세(世)이며, 고려조에서 광산김씨를 빛낸 인물이다. 광산김씨는 크게 5대파로 갈린다. 그 중 양간공 후손은 가장 인구수가 많은 대파인 양간공파(良簡公派)가 되었다.  

 

공(公)은 1215年에 出生하고 1291年 5月25日 졸(卒)하니 수(壽)는 77歲이다.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으로 初名은 중룡(仲龍)이고 자(字)는 기지(器之)이며 아버지는 증 문하시랑(贈 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齡)의 따님이다. 광산김씨 5대파 중 가장 큰 파인 양간공파의 파조이다.
공은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썹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38년(고종 25 戊戌)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善政)하였고 네 고을에 치적(治積)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 1) 경상도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어 동정(同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戰艦)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解夢)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匡靖大夫 僉議侍郞 贊成事)로 치사(致仕)했다.
화상(畵像)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고 화상찬(畵像贊)만 남아있다. 1261년(원종 2)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後孫) 부필(富弼)의 종가(宗家)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존(現存)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1781년(정조 5)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묘(墓)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설단 하였다.
配는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조씨(綾城曺氏) 父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저(著), 祖 검교신호위장군복정(檢校神虎衛將軍僕正) 추재(樞材), 曾祖 호장보윤(戶長甫尹) 자렴(子廉), 外祖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주(貞州) 정장(鄭莊)이다. (見高麗史列傳, 有畵像贊及辛酉戶籍).

 

사우(祠宇) 숭덕사(崇德祠)와 재실 숭모재(崇慕齋)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길 148-12에 있다. 숭덕사에는 매년 음력 3월 1일 세일사를 봉행하고 있다. 묘는 실전되어 있으나 사우와 재실은 훌륭하며, 잘 관리하고 있다. 

 

양간공은 정경공 김사원과 참지정사공 김사형 두 아들을 두었다. 정경공은 아들 장영공 진을 두었다. 장영공은 진은 전리판서공, 판군기감사공, 사온승공, 판도판서공, 밀직부사공 등 5 아들을 두었다. 이 다섯 아들이 중파로 나뉜다. 양간공 종중은 이들 정경공 후 5대 중파와 참지정사공파로 구성되어 있다.

 

양간공 사우 숭덕사와 재실 숭모재를 살펴본다. 

안쪽에서 본 외삼문이다. 밖에서 본 외삼문 사진이 없어 아쉽다.
지난해 세운 숭덕사 표지석이다.

 

숭덕사 묘정비이다. 묘정비 뒤로 보이는 건물이 외삼문이다.

 

내삼문이다.
내삼문 앞에서 제관과 집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관 집사 분정기이다.
숭덕사에 있는 제단이다. 좌측부터 양간공제단, 정경공 제단, 참지정사공 제단이다.

 

양간공, 정경공, 장영공 신주를 모신 사우 숭덕사이다.
양간공 제상이다.
정경공 제상이다.
장영공 제상이다.
양간공 제상 진설도이다.
연(양간공), 사원(정경공), 진(장영공) 축문이다.
숭덕사에서 제례 봉행을 마친 후 제관과 집사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례봉행을 하고 있다.
숭덕사묘정비가 앞쪽에 있다.

 

양간공과 배위 능성조씨 신위이다.
재실인 숭덕재이다.

 

숭덕재 현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