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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만제(서호공원)

서호(祝萬堤) 해설(1) " 축만제(祝萬堤) 축조(築造)"

by 仲林堂 김용헌 2021. 3. 9.

농촌진흥청 북서쪽 여기산(麗妓山) 밑에 있는 저수지로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렸으나 수원시는 지난해 3월 18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일왕저수지와 서호의 명칭이 원래 이름인 ‘만석거’와 ‘축만제’로 공식 변경됐다고 밝혔다. 

 

축만제는 본래 정조대왕께서 둔전에 물을 대 농사짓기 위하여 조성하였으며 그 후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으로 이용했으나 근래에는 도시화되어 농토가 없어 수리용으로 활용은 거의 미미하고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의 화성 축성과 만석거 축조]

정조대왕은 1789년(정조 13) 국왕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을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서울 동대문구)에서 지금의 융릉(현릉원) 자리로 옮긴다. 그런데 묘소 자리에 바로 앞에 수원관아가 자리해 있었고, 민가가 많아 관아와 주민을 지금의 수원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다. 그 후 수원화성을 정조 18년(1794년) 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1796년 9월 10일 완공하게 된다.

 

화성 축성 두 해 전인 1794년 극심한 가뭄이 전국적으로 들자 화성 공사를 중단 할 것을 명했다. 대신 화성 북쪽의 평평하고 비어 있는 땅을 개간하고 관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도록 하면 옥토가 되어 생산량이 높아질 터, 이  비용을 이용하면 화성 축성 공사를 지속할 수 있으리라고 예견했다. 이 윤음에 다라 내하전 1만 2,666냥으로 둔전을 개발하고, 5,960냥으로 만석거(萬石渠)를 축조했다. 

 

1794년 심한 가뭄으로 겨울 화성 축성 공사를 중단하라는 윤음이 내려와 먼저 북성 밖에 땅을 개간하였다. 이듬해 봄 광교산 상류 근처에 보세우고 새로운 밭을 만들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3리 거리에 있는 고등말 북쪽 뻘에는 소금기가 있어 바라 보면 황량했다. 마침내 진목정 아래에 시내를 잘라 방죽을 쌓고 물을 채우고 갑문을 설치하여 물을 대여 이롭게 하니 바로 이렇게 축조한 만석거였다.

 

[첨단 기술로 저수지 수문 설치]

만석거에는 두가지 형태의 수문을 설치했다. 하나는 북쪽 바위층을 파서 만든 수구(水口)이고 다른 하나는 남단 입구에 수로 입구에 설치한 수갑(水閘)이다. 수구는 만석거 내부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활을 하였으며, 수갑은 관개할 때 수량을 적당히 조절하는 역활을 했다. 만석거에 설치한 수구와 수갑을 축만제에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축만제의 수갑은 지극히 견고하고 치밀하여, 정교하고 교묘하여 제언(堤堰)에 물이 가득 차도 물이 흘러내릴 걱정이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수갑은 바닦에서 1장반 높게 설치하여 물을 관개하려면 물 수위가 1반장  이상으로 높아져야 가능한 구조였는데 그 이유는 양어(養魚)를 위한 것이었다. 만약 농사에 필요하여 물을 다닥까지 뺄 경우 양어가 불가능하므로 애초부터 수갑을 바닥보다 높게 설치하였던 것이다.

 

[수원성에 주변에 축만제 등 4개 호수 축조와 설치 배경]

신도시 화성에서 만석거, 만년제 등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정조는 "농가의 이로움은 수리(水利)만한 것이 없다."라고 토로하며 1799년(정조 23) 화성부 서쪽 5리에 있는 여기산 아래에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인 길이 1,246척(377.5m), 너비 720척의 축만제와 축만제둔을 건설하였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비해 그 규모가 3배에 달하였다. 당시 화성유수였던 서유린이 균역청에서 빌린 1만냥을 바탕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호서 암행어사 신현(1764-1827)이 올린 별단으로 보아 1799년(정조 23) 2월 초순에 공사가 시작되어 5월에 완공 된것으로 추측된다. 축만제 아래쪽에 설치한 축만제 둔전은 총 규모가 답 83석 15두 4승락에 달했다. 

 

수원성을 쌓을 때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1795년에 완성했다. 남지(南池)에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8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축만제는 서쪽 여기산 아래에 설치했다.

 

만석거 조성하여 성공을 거둔 후 1798년 10월 장용영 외영의 군영을 위해 화성에 축만제와 서둔(西屯)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비변사가 제안하였다. 우의정 이병모의 반대도 있었으나 다시 논의를 거쳐 사업을 추진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古木)들이 서 있다. 보수관리는 축제 후 4년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하여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고, 여기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축만제와 만년제의 명칭 유래]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석이 축만교에서 동쪽으로 50m 지점 제방 위에 위치하고 있다. 축만제라는 이름 중 "만(萬)자는 사도세자 묘역에 설치한 만년제(萬年堤)에 쓴 만년(萬年)이란 의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당초 정조는 만년제는 농업용수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릉인 현릉원을 보호하고 자 못(연못)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조는 현릉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화성유수부에 장용영을 신설하고, 화성유수부의 위상을 도성과 버금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화성유수부의 의미를 한고조 유방이 태상황(太上皇)이 있는 곳(新風)에 읍을 설치하고 만년(萬年: 아주 오랜 세월)한 것에 비유하여 화성에 만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 처럼 만년제는 처음부터 농업용지로 조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조는 만년제를 농업용수로 개편할 의지를 보여주고 이를 직접 지시하였다.

 

[저수지와 둔전 조성 성과]

화성에 저수지와 둔전은 정조의 의도대로 선진적 농업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농업 진흥책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조선 농업을 둔전제의 적극적인 활용으로 전개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심시키고자 하였다. 화성유수부에서 실행된 장용영의 둔전은 백성과 군사들이 공동으로 농사짓고 이곳의 수입금으로 군사들의 급여와 화성 수리의 비용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 제방의 축조와 둔전 농업을 통해 화성의 토지는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농업 생산력도 늘어났다. 그리고 둔전에서의 병작반수(竝作半收: 지주가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수확량의 절반으로 매기는 일)라는 안정적인 제도를 통해 균역법을 혁파할 수 있는 군포 납부의 폐단까지 가능했다. 이는 단순히 농업생산력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조선 전체의 민생안정과 삼정(삼정: 조선 시대, 국가 재정의 근본을 이루는 전정, 군정, 환정을 아울러 이르던 말)이 문란을 혁파하기 위한 개혁 방안이었다.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등재]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년 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nternational Commission on Irrigation & Drainage: ICID) 제67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국내 최초 등재되었다.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은 전 세계에 105개소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축만제와 만석거를 포함하여 5개소가 있다. 축만제는 우리나라 '세계 관개시설물유산 중 맨 먼저 2016년 등재되었다.

 

 

정조가 화성축성을 중단시키고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하라고 지시한 윤음이다.

 

만석거에 사용한 수문이다. 축만제 수문은 만석거의 수문보다 정밀했다고 한다.
축만교다. 이 다리는 1978년 쯤 나무 다리를 헐고 세웠다.
수문이다.

 

축만제 제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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