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생각

인물에 대한 평가

by 仲林堂 김용헌 2020. 1. 7.

춘추시대에 관중(管仲)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제(齊)나라의 임금 환공(桓公)을 보필하여 제나라를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첫번째 패자로 등극케 한 일등공신이다. 포숙아(鮑叔牙)와의 우정이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바로 그 관중이다. 그는 왕도 제후도 아니면서 대부(大夫)로서 그가 세운 공은 정말 대단했다. 


이런 관중에 대해 공자는 『논어』 팔일편 22장에서 아주 깎아내렸다. "관중은 그릇이 작다(管仲之器小哉)." 또 "누군가 관중은 검소했냐고 묻자 삼귀(三歸; 3여자에 장가 듬)했고 불섭(不攝: 일을 여러가지 겸해서 하지 않음)해 검소하지도 안했다"고 했다. 다시 "그러면 관중은 예를 아느냐고 묻자 임금도 아닌데 수색문(樹塞門)이 있고 술잔을 되돌려는 자리(有反坫)가 있다며 예를 모른다."고 했다. 주자(朱子)는 집주(集註)에서 "성현의 대학지도를 모른다(不知聖賢大學之道)"고 했고, "천하의 패자가 되었으나 그 근본이 본디 천박하다(覇天下基本固其已淺矣). 관중이 죽고 환공이 죽었을 때 천하가 다시는 제나라를 종주로 삼지 않았다(管仲死 桓公薨 天下不復宗齊)."고 했다. 


그런데 『논어』제14 헌문편에서공자의 관중에 대한 평가는 앞서와는 달리 아래와 같이 높이 평가했다.

혹자가 관중(管仲)에 대해 묻자 "백씨(伯氏)로부터 병읍(騈邑) 삼백호를 빼앗았지만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원망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자로가 관중이 어질지 못하다고 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환공이 아홉 번이나 제후들을 규합하면서 군사력으로써 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다. 그만하면 어질지 않으냐?(九合諸侯 一匡天下)"고 했다. 


공자의 관중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앞 뒤가 갈린다. 팔일편에서는 그릇이 작다며 검소하지도 않고 예도 모른다고 혹평을 했으나 헌문편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공자의 평가가 일관성이 없으니 어찌된 영문인가? 뭔가 잘 못 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앞뒤가 일치하지 않으나 이것이 오히려 공과(功過)가 다 있는 진정한 평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 성현과 같이 하나의 오점도 없이 바르게 사신 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적(功績)도 있으면서 과실(過失)도 있다. 공자가 관중의 평가와 같이 있는 그대로 해야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빛만 들어내고 어둠을 감추는 경우가 많다.  


국보 중 국보인 다보탑이다. 다보탑과 같이 세상에 천년을 두고 빛나는 인물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