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觀德亭)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도 1동에 자리한 군사훈련용으로 지어진 조선시대 건물이다. 보물 제322호이며,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辛淑晴)이 군사훈련청으로 창건한 것으로 제주도에 있는 전통적인 건물 중 가장 크다. 1480년(성종 11) 목사 양찬(梁讚)이 중수했고, 1690년(숙종 16) 이우항(李宇恒)이 개축하고, 1753년(영조 29) 김몽규(金夢圭)가 중창했다. 현재의 건물은 1850년(철종 1)에 재건한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다.
관덕정은 정자로서 이렇게 큰 건물은 나는 처음 본다. 규모가 큰 것도 놀랐지만 또하나 재미 있는 것에 대들보 아래 창방에 그린 그림이다. 대들보 아래에 창방(기둥
이에 관한 글은 다음 카페 "제주큰동산(http://cafe.daum.net/7jeju)에서 따와 일부 수정했고, 사진은 본인이 촬영했다.
나와 함께 수원향교 장의 4명이 7월 10일 오전 비가 오는 날씨에 관덕정을 찾았다. 유난히 큰 정자에 눈길이 갔으나 누구의 설명도 들을 수 없어 안내게시판을 보고 제주관아로 이동했다. 제주관아 관람 중 우연히 이곳 해설사를 만나 해설을 부탁하니 흔쾌히 허락하고, 비속에서도 성의 것 해설을 해줬다. 제주관아 해설을 다 듣고 나오면서 관덕정으로 가서 해설을 해 준다. 그는 이곳에 대들보 아래에 보물로 지정된 그림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1.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두보는 귤을 던지는 여인들의 교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자를 타고 가고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교자를 타고 양주 고을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유흥가의 미녀들이 우르르 담벽으로 몰려와 잘 생기고 남자다운 그의 풍모에 넋을 잃고 환호성을 지르며 나무에 달린 귤을 닥치는 대로 분질러서 두보를 향하여 마구 던졌다. 그러나 술에 취한 두보는 눈을 뜨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교자가 양주땅을 빠져나와 비로소 눈을 떠보니 교자안에 귤이 가득 차있었음을 알았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2. 상산사호(商山四皓)
상산이란 지금 중국의 협서성에 있는 지역으로 지세가 험준하나 아름다운 산악으로 첩첩히 둘러싸여 외부와의 연락이 쉽지 않은 곳이다. 그 곳은 기화요초(奇花妖草)가 만발하고 경치가 수려하여 이 세상의 선경(仙境)으로 알려진 곳이다.
진시황 말년에 전란이 계속되므로 호호백발 네 노인은 난을 피하여 상산 땅에 피난을 오게 되었다. 그런데 한 농부가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에 오게 되었다. 기화요초와 적송이 우거지고 풍황이 날아다니는 훈훈한 공기속에서 한 노인는 오수를, 두 분은 바둑을 두고 한 노인은 구경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한참 바라보던 농부는 문득 집 생각이 나 휙 돌아서니 어깨에 메었던 도끼자루가 썩어 떨어지고 말았다는 전설의 장면을 그리고 있다.
3.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남쪽 들보 안 오른쪽 그림은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적벽강에서 조조의 군대를 화공으로 크게 이겼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제갈량은 부채를 들고 있다.
유비는 제갈량을 세 차례나 찾아가 예를 드려 제갈량을 신하로 삼고 그의 지략을 얻어 불과 3만으로 조조의 수군을 적벽강에서 동남풍을 이용하여 화공으로 대군을 섬멸하였다. 대패한 조조는 북방으로 도주하였고 남하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유비는 한중을 취하게 되었고 성도를 중심으로 하여 후에 촉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4. 서성탄금도(西城彈琴圖)
제갈량은 모사꾼이며 심복 부하인 마속으로 하여금 가정성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마속은 악전고투하였으나 조조의 모사 사마의에게 침공당하여 어쩔 수 없이 성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충인 철벽금성이 무너졌으니 이제 본루인 서성 함락은 촌각에 달려 있었다. 서성마저 함락되는 날에는 조조가 삼키고 만다.
초조한 마음을 누를 길 없는 제갈량은 홀로 말을 몰아 서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높다란 성문 누각에 앉아 태연하고 한가롭게 대금을 잡고 천하태평곡을 타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가정성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공격해 오던 사마의의 10만 대군은 이 광경에 깜짝 놀라 이것은 필시 복병전략으로 반격할 계략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숨을 죽이며 후퇴하였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위 내용에서와 같으나 제갈공명이 다금을 타는 모습을 찾을 수는 없다.
5. 홍문연(鴻門宴)
항우가 중원에서 분투하고 있을 때 유방은 이미 관중에 들어가 진(秦)의 항복을 받고 국도 함양을 점령하였다. 뒤늦게야 관중으로 들어온 항우는 극히 불쾌하였으나 자기의 호세를 보여주리라 마음먹고 홍문(협서성)에서 큰 연회를 베풀어 유방을 초대하였다. 진중의 연회라 하나 참으로 호화스러웠다.
항우의 부하 범증이 검무를 추는 도중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유방의 부하 번쾌는 청용도를 빼들고 그에 맞서 능한 솜씨로 대응하였다. 이로 인해 범증은 유방을 죽일 기회를 잃게 되었고 항우의 속셈만 보이게 되어 후환을 남기게 했다. 훗날 중원에 다시 난이 일어나자 유방은 항우 타도군을 일으켜 한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싸움이 벌어지고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전사하였다.
이 그림에서 항우와 유방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는 없으나 그림에 있는 건물이 홍문으로 추정된다.
6. 대수렵도(大狩獵圖)
북측 들보 내면에 그려져 있는 고려시대 관원들이 사냥하는 그림이다. 산과 밀림을 건너 창간(槍竿)이 즐비하고, 많은 몰이꾼, 의상과 복식 차림, 수렵장비, 마구 등이 그려져 있음을 보면 틀림없이 관원들의 수렵인 것 같다. 2기식(二騎式) 조직적으로 행동하면서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철추를 휘두르며 짐승을 추격한다. 이 그림은 공민왕의 천산대렵도를 방불한 대역작이다.
7. 십장생도(十長生圖)
이 그림은 북측 들보 외면에 그려져 있는데 십장생이란 사람들이 장수하여 죽지 않는다는 열가지의 물상(物象)이니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이다.
관덕정의 10장생도는 싱싱한 노송을 중심으로 한 쌍의 학과 사슴 등을 자연 풍광과 한껏 어우러지게 그려 넣었다. 구도상으로나 원근법상으로나 단청의 색감과 선의 기교, 음양의 농도 등이 매우 조화있고 솜씨있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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