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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우정 이야기

by 仲林堂 김용헌 2019. 6. 28.

아래는 춘추좌전에 나오는 관중(管仲)이 절친 포숙아(鮑叔牙)에 대한 이야기기이다. 관중은 BC 715년 출생한 사람으로 지금으로부터 2734년전 사람이지만 그 때 이야기가 지금 읽어보아도 감동적이다.


「후에 관중은 포숙을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곤궁할 적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하였는데,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몫을 더 많이 가지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포숙을 위해 일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더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포숙은 나를 우매하다고 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롭고 이롭지 않은 것이 있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갔다가 매번 임금에게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시운을 만나지 못한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여러 차례 싸웠다가 모두 패해서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늙은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였을 때 동료이던 소홀은 죽고 나는 잡히어 욕된 몸이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을 받고 봉읍을 가지기를 십여 대나 하였는데, 항상 이름 있는 대부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였다.(管仲曰,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於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鮑叔旣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제(齊)나라 13대 군주인 희공이 있었다. 희공의 둘째 아들 규(糾)이다. 규의 신하가 관중이다. 관중은 공자 규와 함께 노나라로 망명하여 살던 중 제나라의 군주 '무지'가 소공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못가 반란이 일어나 무지도 죽게 되었다. 왕이 없어진 제나라에서는 왕을 추대하려고 했다. 그러자 희공의 둘째 아들인 규와 세째 아들인 소공이 먼저 제나라로 들어가 왕에 오르려고 했다.


그 때 규를 모시고 있던 관중은 소백이 오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독화살을 소백에게 쏘았다. 그 화살은 정통으로 소백에 명중했으나 소백의 혁대 쇠에 맞았다. 소백은 말에서 떨어져 죽은 체하여 살아 나 규보다 먼저 제나라고 갔다.  관중은 규에게 소백이 죽었다고 고했고, 규는 안심하고 있던 차에 먼제 제나라에 입성한 소백이 규가 있는 노나라에 침공했다. 제나라는 노나라에서 규를 죽이고, 관중을 포로로 잡아 제나라로 오면 전쟁을 그치겠다고 했다. 노나라에서 규를 죽이었으나, 관중은 직접 소공을 죽이려고 화살을 쏜 자로 직접 소공이 죽이겠다고 하여 바로 죽이지는 않고 포로로 잡혀 갔었다.


잡혀 온 관중은 환공의 손에 죽는 것은 뻔했다. 환공의 재상인 포숙아는 환공에게 "관중은 큰 인물이라며 공께서 만약 지금과 같이 보통 제후국의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힘쎈 패자의 나라를 만들려면 관중을 죽이지말고 그를 나의 자리에 등용하라"고 했다.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듣고 관중을 정승으로 삼았다.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패자의 위치로 올려 놓아 천하를 바로 잡았고, 백성이 혜택을 받았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오랑캐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자공은 "환공이 규를 죽였는데 죽지 못하고 환공을 도와 주었음은 인인(仁人)이 될 수 없다."고 했으나 공자께서 "제후들을 규합하여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그를 인하다."고 했다.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管鮑之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 천년 회자되고 있다. 포숙아는 친구 관중를 살리고 자신은 권력을 관중에 주고 관중 아래로 들어갔으니 포숙아는 사람을 볼 줄 알았던 것이다. 또 관중은 위에서와 같이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고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라고 했으며 몇 대를 이어 포숙아의 후손을 녹봉을 받게 했으니 그 우정은 포숙아 못지 않았다. 오고가는 정이 물 흐르듯하다. 천년을 걸쳐 칭송할 만하다.  




큰 그릇이다. 그릇이 큰 환공은 관중을 살려 제나라를 큰 나라로 만들고 자 했다. 이 그릇은 태안 대묘(垈廟)에 있는 방화수를 담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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