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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남계 신근식 선생의 한시 이야기를 찾아서

by 仲林堂 김용헌 2018. 12. 1.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서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抗)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 것과 같이 항주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소주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가 풍교(楓橋)이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는 과거에 낙방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풍교에서 숙박하면서 풍교야박(楓橋夜泊)이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명시로 알려져 있다.

 

楓橋夜泊- 張繼

풍교야박- 장계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니 까마귀 울고 하늘에 서리 가득

江楓漁火對愁眠 강촌교 풍교의 어선 불빛 마주보고 시름에 잠기는데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의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 종소리가 뱃전까지 들려온다.

 

남계(藍溪) 신근식(申謹植)선생이 2000년 중국의 소주에 갔을 때 한산사에서 이 시비를 보았다고 한다. 그 때 중국사람과 일본사람들은 이 시를 읽고 감탄하고 있었으나 우리나라 사람은 하나 관심이 없음을 보면서 우리의 선조들은 누구나 시를 했었는데 근래 한시 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있음을 안타까웠다고 했다. 한편 선생께서는장계의 시가 겨우 몇 수밖에 안되지만 1,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음을 보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다시금 생각하고, 나는 많은 시는 많이 짓지 못하더라도 평생 100수만 짓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돌아온 후부터 한시에 매진했다고 한다.

 

선생께서는 조선 초기 대신이며 문한가로 고명한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후손으로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에서는 태어났다. 양감면에 자리 잡은 것은 선생의 증조부 때부터라고 했다. 선생께서 초등학교 2학년에 육이오 사변이 터졌고, 공산 치하에서 교사는 제식훈련, 군가를 가리키며 등하교 길에 군가를 소리 높여 부르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냐"고 여쭤, "그 사실을 말씀드리니 안 되겠다"고 하시면서 한문공부를 하라고 해서 그 때부터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선생의 조부께서는 80세에 사서삼경, 시경, 통감절요를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외우셨다면서 아직까지 조부님 같은 분은 못 보았다고 했다. 선생께서는 명문인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1학년 때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그 때 권근 선생의 동국사략(東賢事略), 소학(小學), 맹자(孟子)를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 김삿갓 노래가 유행했었고, 그 때 김삿갓 시집을 재미있게 보았다고 했다. 서울 법대에 입학하여 1학년 때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한시를 배웠으나 작시는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사법고시 5년간 공부하면서 한학을 할 수 없었고, 그 후 취직하여 중동에서 5년간 근무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근무할 때를 제외하고 늘 당시(唐詩), 고문진보(古文眞寶), 난중일기, 열국지(列國誌)를 공부했고, 중동에서 돌아 온 후 자영업을 10년하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10시에 일하느라 한학은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중국여행에서 돌아 와 교보문고에서 한시 책을 사 배웠으나 이해는 되나 짓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그 때 100수를 지었다고 한다. 종로에 있는 ()한국한시협회에 찾아가 작법 강의 들으면 좋을 거라고 2년을 배웠다. 그 때 대령 출신 일본어 번역가인 하영석 선생으로로부터 배웠다고 했다.

 

그 때 300수를 지었고, 대만 사람이 펴낸 책을 대구의 한 교수가 가지고 와 교재로 1년간 사용했으나 신통치는 못했다고 했다. 한시협회에서 공부도 그만 두고 낙원상가에서 일가 사람으로부터 2년을 별도로 배웠다고 한다. 한시협회에 다니면서 1년에 500수를 짓고 다른 사람 시를 2,000수를 첨삭했다고 한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니 자신도 모르게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한시협회에서 강사가 세 분이 거쳐 갔으나 수강생은 점점 줄어 7명밖에 없었다. 그 때 선생께서 강의하라고 하여 6-7년 만에 33명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한시협회에서 중급반 20, 초급반 15명을 가르치고 있다.

 

선생께서는 수원향교 명륜대학에서 올해로 7년째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초급반이라고 할 수 있는 한시반에서 수강생이 30여명을 대상으로 한시작법(漢詩作法), 해동명추 고금련구집(古今聯句集), 당시(唐詩), 김삿갓 시집 등을 가르치고, 중급반인 화홍한시회에서 20여명을 대상으로 각자 작시(作詩)하면 첨삭(添削) 지도해주고 있다.

 

장계가 과거에 낙방하였지만 풍교란 시 한 수로 이백과 두보와 같은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솟아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남계선생의 처지도 장계와 비슷하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를 나왔으나 과거시험라고 할 수 있는 고시에 낙방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여 젊은 날을 방황했었다. 그러던 중 60세가 되던 해 소주에서 장계의 시를 보고 죽기 전 100수만 짓겠다고 했던 것이 18년이 지난 지금 2천수를 넘었고, 그 시가 주옥같이 않은 게 하나 없으니 선생께서 생각하신 옛 사람의 경지에 거의 이르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께서는 "한시는 사대부 귀족문화의 전형으로 계승되어 왔으며 동양문화의 꽃으로 우리 몸속에는 한시 친화적 정서가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근래 한글전용을 하면서 외면당하고 있다"면서 문화의 꽃이 시들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시며 한시 부흥에 진력 매진하신고 있다.

 

선생께서는 "()는 의사전달 뿐만 아니라 노래와 같이 소리 내어 읊음에 그 맛이 있다면서 일정한 운율에 따라 단록마다 같은 성조로 끝나므로 흥취를 고조킨다며, 이와 같이 점이 있어 운문(韻文)이 이라고 하며 이런 고유 특성 때문에 오래도록 보존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했다.

 

또한 선생께서 후학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백세시대를 맞아 시간은 많고 할일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작시(作詩)공부나 정서 함양에는 무심한 세태를 보인다. 두보(杜甫) 같은 시성(詩聖)시를 몹시 탐내어 시어(詩語)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겠노라(爲人性癖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고 했다. 이 말을 염두에 두고 근력이 있는 동안 시 짓기를 중단하지 말아야 할 거라고 했다.

 

선생을 뵐 때면 논어 술이편 3장에 "군자는 평탄하여 여유 있고 소인은 늘 근심한다(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는 글귀가 떠오른다. 정자(程子)는 집주에서 "군자는 천리를 따르므로 몸과 마음이 항상 펴지고 태연하며, 소인은 외물에 사역 당하므로 걱정과 근심이 많다"고 했다. 한시의 지평을 여신 남계 선생님은 항상 평탄하고 너그러운 군자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다.

 

다음은 남계운고 4집에 있는 선생의 시 한 수이다.

 

白雪滿乾坤 흰 눈이 천지에 가득하네

 

冬眠貝殼十餘家 조개껍질처럼 십여 집이 겨울잠에 빠졌는데

機樹滿開淞雪花 앙상한 나무에 상고대와 눈꽃이 만개하도다.

玉屑雰霏深巷隔 옥설이 부슬부슬 깊숙한 골목을 가로막고

銀塵散亂遠山遮 은진이 산란하여 먼 산을 가리는도다.

紛紛帽上三春蝶 모자 끝에 어지러운 것은 삼춘의 나비요

閣閣鞋間二月蛙 신 사이 뽀드득 소리 이월 달 개구리일세.

萬象總齊披素服 만상이 다 같이 소복을 입었는데

煙波雲海聒寒鴉 연파 낀 운해에 겨울 까마귀 시끄럽네.

 

 

 

남계선생께서 2015년 10월 8일 화성행궁에서 개최된 제45회 한시백일장에서 고선위원으로 강평하고 있다.

 

 

남계선생께서(앞줄 좌측에서 2번째) 지도한 수원향교 화홍한시회에서 "화홍시집"을 발간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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