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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이야기

나의 고향 마을 부인리 전설과 부인당 모습

by 仲林堂 김용헌 2018. 1. 6.

충남 논산시 부적면 부인리 고향 마을에는 당집이 있다. 이 지역이 대체로 평야지이지만 그곳은 다른 곳보다 높았다. 우리집에서 홍애브리에 있는 우리 밭으로 가려면 이 당집을 지나 갔다. 한번은 그 속에 무엇이 있을 가? 어둠 컴컴해 무서웠지만 용기를 내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신주를 모신 작은 탁자가 있고, 그 위에 그릇이 있었던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나 가 다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월보름에 동네 사람들이 당집을 돌며 풍장을 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인당을 당집이라고 불렀다.


나는 우리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왕건에게 임금이 되는 꿈을 해몽하여 주었다는 전설을 어려서 작은아버지로부터 듣고 있어 잘 알고 있다. 그 이야기가 "디지털논산문화대전" 중 '논산의 마을 이야기'에 자세하게 있어, 복사하여 아래에 붙였다. 그 줄거리는 내가 어렸을 때 듣던 내용이고, 일부 왕전리 이야기, 불손하면 병이 났다는 이야기는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충청남도 논산 지역은 한양과 전라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의 하나였다.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여산 사이의 논산 구간을 정리하면, 노성면-부적면 부인리-부적면 마구평리-부적면 아호리-은진면 교촌리-채운면 야화리-채운면 장화리-채운면 삼거리-강경포로 나타낼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일부 마을에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동시에 길손의 안녕을 도모하는 서낭이나 노표(路標) 장승 등이 있었고, 또한 이들에 대한 제사가 전승되어 왔다. 물론 이들 공동체 제사가 아주 오래전에 쇠퇴·소멸된 곳도 많지만, 일부는 현재적 의미를 지닌 채 잔존(殘存)하고 있다.


[부적면 부인리의 부인당]
부적면 부인2리 지밭[祭田]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에 부인당(夫人堂)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부인당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예언한 여무(女巫)를 모신 사당으로, 마을 뒤편의 논 가운데에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부인당이란 ‘부인(夫人)의 화상(畵像)으로 나타낸 서낭신’을 모시고 위하는 당집이다. 화상에 따라서는 각시당과 할미당의 구별이 있다. 원래 지밭의 부인당은 언덕에 있었고, 또한 여기에는 묘소들도 있었다. 지금은 언덕이 없어져버렸고, 주변 일대도 모두 논으로 개간되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호남에서 서울로 올라가던 호남대로의 교통 요지였다. 따라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부인리 바로 인근의 덕평리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곳은 넓은 들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덕들’ 또는 ‘덕평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조선시대 원님들이 가마를 타고 한양을 오갈 때 다 보인다 하여 ‘가마들’이라고도 불렸다. 부인당 동쪽의 초포교(풋개다리)는 『춘향전(春香傳)』사설에도 등장하는 교통로이다. 부적면이라는 이름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 당시 부인처면(夫人處面)과 적사곡면(赤寺谷面)이 일부 합친 데서 유래한다. 부인처면은 고려 초 어느 부인이 살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지금의 부적면 부인리가 그 부인이 거주하던 곳이고, 부인당은 바로 이 부인을 기리는 당집이라고 전한다.

지밭이란 자연마을 명칭은 제전(祭田)에서 나왔다. 이는 부인당 제사를 위한 위토(位土)이다. 부인당의 제전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하사한 땅으로 부인리 부근 전체라고 전한다. 지금의 지밭에서 등불이 비치는 곳까지 이른다고 한다.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인근의 광석면 왕전리(旺田里)도 태조 왕건과 연관된 전설을 가지고 있다. 부인당의 주인공은 조영부인(窕英夫人)으로 보인다. 부인당의 위패에도 조영부인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전설에서도 그러하다. 조영부인은 왕건이 견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그가 삼한을 통일할 인물임을 예언한 무당할머니이다. 왕건은 이 노무(老巫)에게 보은(報恩)의 뜻으로 이 일대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와 관련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려고 군사를 본읍에 머물게 했다. 그때 이곳에서 왕건은 몸에 삼목(三木)을 지고, 머리에는 큰 되를 이고서 깊은 물에 빠지는 꿈을 꾸었다. 왕건은 근처에 한 늙은 할머니가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친히 가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노파는 일이 있어 출타 중이었다. 노파는 외출하기 전에 자신의 딸에게 이르기를 ‘오늘 늦게 귀인(貴人)이 오실 터이니 너는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그 분을 머물게 있게만 하되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일렀다.

과연 늦게 왕건이 와서 꿈 이야기를 물었는데, 노파의 딸이 함부로 불길한 징조라고 말해주었다. 왕건은 좋지 않은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잠시 후 노파가 돌아와서 딸에게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놀라, 딸을 시켜서 왕건을 뒤쫓아가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왕건이 오자 노파는 점괘를 풀어보고 대(大) 길몽(吉夢)이라고 풀이해주었다. 삼목을 진 것은 ‘임금 왕(王)’ 자요, 큰 되를 인 것은 면류관을 쓴 것이요, 깊은 물에 들어간 것은 용담(龍潭)을 본 것이라 하였다. 왕건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대 말과 같이 된다면 그대의 공(功)을 잊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그 후 왕건은 전전승승(戰戰勝勝)하여 후백제를 무너뜨리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이 할머니에게 ‘조영부인’이라는 봉작(封爵)을 주고 오늘날의 왕전(旺田)과 제전을 하사해주었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후손이 없어 근방의 동민들이 부인당이란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이곳을 ‘부인처면’이라 명하고 그 동리를 ‘제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인당에 모셔진 이곳의 산신은 매우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상주(喪主)를 비롯하여 조금만 부정한 사람이 지나가도 다리가 부러졌다. 더욱이 말을 탄 사람이 하마(下馬)하지 않으면 말다리가 부러지거나 승마(乘馬)했던 사람이 앉은뱅이가 되기도 했다. 한편 산신에게 정성껏 소원을 빌어서 아들을 낳은 사람도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이 매우 영험하기에 두려워했고, 평소에는 부근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옛날 일이 되었다. 한여름에 마을 사람들은 부인당 근처에 자리를 펴놓고 더위를 식히기도 하고, 밤에는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들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부인당의 옛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논산시의 지원금으로 개·보수된 부인당은 흙벽에 시멘트를 덧바른 뒤 백색 페인트로 칠하고, 벽돌로 담을 둘렀다.

과거에는 음력 정초가 되면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 중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닿는 사람으로 세 명의 제관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제관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한 명의 제관만 선출한다. 옛날에는 제관으로 뽑히면 이레 동안 집 밖 출입을 삼가고, 부정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금기를 지키지 못하고 정성이 부족하면 산신제를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관이 죽거나, 까치·참새 등이 집집마다 문이나 창문을 쪼기도 했다고 전한다. 며느리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시아버지가 제관을 맡아 산신제를 모셨다가 탈이 나기도 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제의 사흘이나 일주일 전에 음식을 마련하는 사람의 집 삽짝(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피웠다. 금줄에는 종이를 잘라서 끼우고, 황토는 삽짝 양쪽에 세 무더기씩 놓았다. 이렇게 정성을 드리는 동안에는 마을 사람들도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제비(祭費)는 마을의 동답(洞畓)에서 나오는 소출로 충당하였다. 과거에는 마을 사람들이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다녔다. 제물로는 시루떡·쇠고기·통명태·나물·메·탕·술 등을 올린다. 떡은 시루떡으로 마련하며, 나물은 한 가지나 세 가지로 짝을 맞추지 않는다.

제사 당일 밤 10시경이 되면 산신제를 지낸다. 과거에는 자시(子時)에 지냈지만 점점 이른 시간에 지내고 있다. 메는 부인당에서 직접 솥에다 지었고, 각종 제물은 백지에 하나하나 싼 채로 제관 집에서 날라 왔다. 제사는 분향(焚香)-재배(再拜)-헌작(獻爵)-재배-독축(讀祝)의 순으로 진행된다. 과거에는 제물을 모두 진설하면 징을 쳐서 제의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징 소리를 들으면 시루를 장광에 가져다놓고 정성을 드리는데, 이를 ‘마짐시루’라고 한다.

산신제의 마지막에는 마을 사람들의 소지를 올려준다. 이렇게 제의가 끝나면 제관 일행만 음복(飮福)을 한다. 제관은 1년 동안 문상(問喪)을 하지 않는 등 일체의 부정을 가린다. 일반 동민(洞民)들도 음복을 하면 세 달 동안은 부정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탈이 났다. 만일 제물이 일부 남는다 해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마을 앞의 노성천에 흘려보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어렸을 적에 본 후 2018년 1월 14일 오후 처음 가 보았다. 건물은 그대로였고, 느티나무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둘레가 다 없어졌다. 그 때 전체적인 모양은 아래 그림과 같이 잔디가 심겨진 흙담이 있으나 지금은 흙담은 사라지고 건물만 남아 있었다. 흙담은 높이가 1.5미터쯤이었다. 흙담이 있던 곳에 사방으로 빨간벽돌 담이 처 있었다. 부인당은 감옥에 가처 있는 듯 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건물 내부는 자물쇠로 잠겨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도 남쪽에는 문 하나가 있었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깜깜했었다. 예전에는 철문이 아니 었으며, 문턱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자물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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