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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수원화성 서암문의 복원을 보며

by 仲林堂 김용헌 2018. 1. 2.

새해를 맞이하면서 올해는 무엇이든 그냥보지 말고 깊이 관찰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첫번째 수원화성의 남서암문을 촬영했고 글을 올립니다.  


수원화성은 정조 18년(1794년)정월 초이렛날 시작하여 34개월만인 정조 20년(1796년) 9월 10일 완공했다. 정조는 정조는 화성축성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명하여 제작한 것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이 책자는 화성을 건설 할 때 축성과정, 물량, 시설물의 세세한 기록이다.


1794년 축성 후 관리가 안되었고, 1960년대에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975-1979년 복원했다. 수원화성이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화성성역의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1년 일제 때 간행된 조선고적보도에 화성사진이 수록되어 설계에 참고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원형 복원이 불가능했다고 본다.      


지난 12월 31일 운동 겸 서암문을 통과하여 서장대에 올라 서남암문을 지나 화양루를 둘러본 후 남문과 동남각루를 지나 봉수대에서 여러 각도로 촬영하고, 창룡문과 연무대를 촬영하고 돌아 왔다. 이번 탐방에서는 서암문과 서남암문을 자세히 관찰했다.


다음은 서남암문의 사진과 해설이다. 복원 당시 수원성복원정화사업 4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에서 발간한『1970년대 수원화성 복원과 기록』책자에서 촬영한 사진과 내가 12월 31일 직접 답사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화성성역의궤 사진과 글이다. 아래에 있는 글을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서남문은 서암문에서 남쪽 367보에 용도(甬道: 성밖으로 외적을 감시하기 위하여 만든 길)가 있고, 그곳에 화양루로 가는 통로이다. 홍예(虹蜺: 무지개 아취)의 안쪽은 높이가 7척이고, 높이가 8척 5치, 밖으로는 6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상단은 내외가 평평하게 설치했고, 여장(女墙) 내에 건물이 있다."

이 사진은 성밖에서 본 모습이다. 앞쪽에 여장이 있는 성벽이 보인다.

 

복원 당시 사진이다. 전혀 서암문은 포사(鋪舍)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축석만 보인다. 성 안쪽에서 본 모습이다.


축성 위에 홍예를 세우고 있다.


국문, 영문, 일어, 중어로 된 간판이다. 가운데 마크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을 나타내는 심볼이다.


포사(鋪舍)에 있는 총안 그림이다.


성안쪽에서 멀리서 본 서암문이다. 위 건물은 포사(鋪舍)이고, 아래는 암문이다.


가까이 본 서암문이다. 하단은 돌로 축석을 쌓았고, 상단은 벽돌로 쌓았고, 그 위에 포사(鋪舍)를 세웠다.


서쪽 측면에서 본 포사(鋪舍) 지붕 안쪽을 촬영했다.


암문 천정에 있는 그림이다. 용 한 마리가 포효하고 있다.


암문 내벽이다.


서암문 사적 표말이다. 빨갛게 변색된 돌은 돌 속에철분이 많은 돌이다. 이 돌은 팔달산에서 채석한 돌이고, 상단에 철분이 없는 돌은 지하 50-100미터에서 채석한 돌로 복원할 때 사용한 돌이라고 한다. 
 

밖에서 본 서남암문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나와 있는 도면과 같다.


서남암문 앞으로 난 여장이 있는 길이다. 이 길 끝에 화양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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