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교활성화사업단(단장 최영갑)이 주관한 '2017 문화관광프로그램 향교·서원 전문가 양성 교육이 2박 3일간 3차에 걸쳐 총 9일간 있었다. 이번 교육 참가자 100명은 3차 교육과정 중 11월 8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군 서종면 소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를 찾았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가 다산 생가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여 하차하니 은행잎이 노란 단풍을 먹음고 반긴다. 버스에서 하차하기 직전 해설을 맡은 가이드가 무선송수신기를 하나씩 준다. 채널을 맞추니 가이드가 보내는 말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온다. 먼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전체 기념사진 촬영이다.
해설사는 우리 일행을 다산이 지은 서명을 새긴 오석(烏石)보드블럭으로 안내한다. 다산이 지은 책이 503권이라고 한다. 많은 서명을 보니 다산은 참으로 대단한 분이구나 감탄이다. 지금 사람도 책 500권을 저술한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보통사람이 한 평생 베껴 쓰기도 힘든 분량이다. 이는 복숭아뼈가 세번이나 구멍 뚫리는 고통을 이겨낸 결과라고 했다.
일행은 다산이 발명했다는 거중기 견본을 구경했다. 거중기는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짐을 나르는 기계로 이용했다.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길 때 다산이 제안한 배를 연결하여 만든 『한강배다리』게시판도 보았다.
그리고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로 이동해 안채 마루에 걸치어 앉아 해설사로부터 다산 이야기를 들었다. 다산은 "여(與)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 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노자(老子)에서 보고 당호(堂號)를 여유당이라고 했다하니, 그가 얼마나 권력자를 두려워하며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했나를 알듯하다.
다산의 파란 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다. 다산은 진주목사를 역임한 정재원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남인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1791년 윤지충이라는 천주교인이 신주를 불태우는 사건 등으로 천주교 박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성균관 유생 때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38세 내직으로 불려와 동부승지에 이어 형조참의로 제수 받으며 임금과 돈독한 교유를 가졌다. 그런데 그의 보호막이었던 정조와 채재공이 죽자 그는 천주교인으로 낙인 찍혀 유배를 가게 된다. 그렇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18년 동안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다. 그는 57세가 되던 1818년 강진에서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 작업을 마무리한 후 1836년 생을 마감한다.
여유당 서북쪽에 다산의 사당인 문도묘(文度廟)을 담 너머로 구경하고, 계단 길을 3-4분 걸어 뒷산에 묘소로 갔다. 그는 "문도(文度)"란 시호를 사후 74년이 지난 1910년에 받았다고 한다. 그의 묘는 실학자 답게 간소하게 석물은 망주석만 있었으나 근래에 상석과 비석을 세웠다.
소위 명당은 좌측으로 청룡이, 우측으로 백호가 엄호하는 지형이라고 하지만 여기 다산의 묘는 청룡과 백호는 없으며, 단지 높은 곳에 있어 멀리 조망할 수 있을 뿐이다. 비석 뒷면에 그가 58세 때 자신이 지은 묘지명이 새겨 있다. 그는 묘지명에서 "사서육경(四書六經)을 안다고 하나 실천한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다고 했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거두고(斂爾紛紜), 창광(미친 듯 날뜀)도 거두면서(戢爾猖狂) 소박한 일에 힘쓰면(俛焉昭事)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乃終有慶)고 했다. 그는 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반성하면서 하늘의 뜻에 따른다면 후대에 경사가 있게 됨을 기대했다.
묘소 방문 후 다산문학관에서 "정약용과 제자들"이란 주제의 특별전시를 관람했다. 엄청난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의 제자는 양반도 있었지만 아전이나 승려도 있었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과거 공부하는 가 하면 문학이나 기술을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다산유허지를 관람하고 한강변에 있는 잠시 다산생태공원에 들렸다. 푸른 잎사귀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올해도 어김없이 작년에 그랬듯이 곱게 물들고 있다. 강물도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공자님께서 냇가에서 흐르는 물을 관찰하고 자공에게 한 말씀이 떠올랐다. "쉬지 않고 흐름은 마치 도(道)와 같아 그 도를 행함이 끝남이 없는 것과 같다(其不息者似乎 道之旣行以無盡矣)"고 말씀이다. 다산 정약용도 강물이 흐르듯 끝남이 없는 것 같이 비록 역경에서도 쉼 없는 공부를 통하여 천일합일(天人合一)의 삶을 실천하지 않았나 생각하면서 다산 유적지 탐방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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