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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서원

화양서원과 만동묘

by 仲林堂 김용헌 2017. 7. 26.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있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 정호 등이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세웠으며, 다음해 사액을 받았다. 그 옆에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1717년 권상하등은 명나라 황제 의종과 진종을 모시는 만동묘(만동묘)를 세웠다.


이 서원은 권세가 막강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심했다. 즉 제수전(祭需錢)의 명목으로 각 군·현에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해 강제로 돈을 걷었다.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화양서원의 이런 행패가 극심하여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여러 번 단속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영이 내려졌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1999년 우암 송시열 유적이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된 후 2004년 송자사 · 승삼문 2동을 복원하였고,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되었던 것이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었으나 광복후 찾아 다시 건립하였다. 


화동서원 하마비이다.


화동서원 묘정비이다. 묘정비는 화동서원의 설립, 역사 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화동서원에 관해 1980년 윤 아무개가 쓴 기록이나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기록도 화동서원이 한 때는 얼마나 영화를 누렸고, 그 적폐가 얼마나 심해 패망했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만동묘 외삼문에서 본 모습이다. 만동묘도 화동서원과 같이 역사의 부침이 있는 곳이다. 복원은 잘 해 놓았으나 관리가 안되고 있는 듯하다. 

  

서재와 같으나 확실치 않다.


만동묘에서 본 화동서원이다. 한 때는 노론의 소굴이 되어 삼남의 수 많은 땅이 이 서원의 것이었다니, 제수를 구한다고 일종의 화폐를 발간했다니 얼마나 썩었나 짐작이 간다.

만동묘 외삼문과 급경사에 만든 계단이 이채롭다.


3계단, 5계단, 9계단으로 되어 있다. 3은 천지인이고, 5는 5방위이며, 9는 최고의 수이다.



중국 명나라는 망해 청나라로 바뀌었으나, 조선에 청나라 황제인 진종과 의종의 신위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낸 곳이 만동묘이다. 만동은 만번을 굴절이 있지만 황해는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표시로 이곳이 중국의 황화문명을 이곳 조선이 이어 간다는 의미이다.

 



두 명의 중국 황제를 모셨으면 두개의 신위를 모신 함도 둘이어야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3개가 있다. 이것도 모르고 그냥 생각없이 3개 신위를 만들은 것인지? 문화재 복원하는 주체가 이 정도도 모르고 있을 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마루 바닦은 신발 자국이 억망이다. 누가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듯 하다.  


내삼문 앞에서 본 외삼문과 그 앞 모습이다.


과연 명나라 황제를 사대사상으로 주권도 없이 세웠다는 것이 지금으로 보면 이해가 안된다. 청나라 몰래 깊은 산 속에 세워 청나라로부터 혼은 나지 않았지만 일제로부터 받은 치욕의 현장이다. 괜한 비석을 세워 일본놈들로부터 굴욕을 당했으니 치욕이다.



만동묘묘정비와 그 비각이다.


비문은 일제가 모두 쪼아 버려 하나 알 수 없으나 근래에 세운 비각은 반듯하다.


접근하여 촬영한 비석이다.


일제가 망가뜨린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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