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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판교공파

판교공(휘 景光)의 묘총(墓塚)설화

by 仲林堂 김용헌 2017. 6. 14.


판교공(景光)은 세종 무신(1428) 감찰공(鐵山)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감찰공께서 출사(出仕)하여 나가 계셨고, 공이 14세가 되던 1441년에 맏형 휘 국광(國光), 26세가 되던 1453년에는 둘째 형 휘 겸광(謙光)이 출사하셨고, 셋째 형 정광(廷光)도 출사하여 집을 비우니 공은 혼자 남아 집안일을 했다. 공이 23세가 되던 1450년 아버지 감찰공께서 세상을 떠났고, 28세가 되던 1455년에 허씨할머니께서 별세하시니, 집안에는 위로 홀어머니 한분만 남게 되었다. 공이 46세가 되던 1473년 어머니께서도 운명하시었다. 그 때서야 공은 학구에 힘을 쏟더니 53세 되던 1480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공은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과 첨정(僉正), 승문원 판교(判校)를 거쳐 통훈대부 군기시정(軍器寺正) 겸 교서관 판교(判校)를 제수(除授)받았다.

 

공은 늦은 나이에 급제하여 웅지도 펴지 못하고 1490(성종 21) 86일 임지(任地)인 한성에서 63세에 생을 마쳤다.

 

장지는 광주(廣州)의 덕장동, 지금의 의왕시 포일동 산 68번지 손좌원(巽座原)에 모셨다. 묘역에는 묘비와 석인(石人)과 망두석이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서 있다.

 

이 묘에 관한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장례를 모시기 위하여 고향인 연산으로 운구할 때 쉬었다 가려고 잠시 멈췄을 때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쳐 상여의 방장을 날아가자 쫒아가서 방장을 회수하려고 하니, 방장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상여를 모시고 그 곳에 이르니 그 때서야 방장이 떨어졌다고 한다. 상여꾼과 조객들은 이곳이 범상치 않은 명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방장이 떨어진 그 곳을 장지로 삼았다고 한다.

 

판교공 묘소는 공이 돌아가시진 현재 527년이 지난 지금도 잘 수호하고 있다. 경술국치를 만나 왜정치하에서 지적법이 개정되자 이 틈을 이용하여 산 전체가 타인의 소유로 넘어 갔었으나 제소하여 1925년 연고임야임이 인정되어 묘소가 있는 두 필지를 다시 찾게 되었다.



판굥공의 묘와 새 비석


판교공의 옛 비석


묘소 뒤에서 판교공 세일사 사진

세일사 봉행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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