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 독락당 탐방기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에 자리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받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을 제향하고 후진(後進)을 교육하기 위해 1572년(선조 5)에 설립되어 1574년에 선조대왕이 내린 사적 154호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영천에서 포항으로 달리는 국도의 중감지점인 안강읍의 북쪽 도덕산과 어래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한 이 서원은 옥산천을 동으로 끼고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제외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그 공간적 배치가 돋보인다.
대부분의 서원이 그러하듯 유림단체나 국학관련 대학생들이 주로 탐방하고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관심 밖이기 때문에 접근성이 나쁘지 않더라고 지나치기 일쑤인 곳이 바로 서원이다. 더구나 기호지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옥산서원은 우리들이 찾기가 어려운 곳 가운데 하나라서, 필자 역시 진작부터 마음은 있었지만 좀처럼 탐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 기회가 나에게 주어졌다. 경주향교에서 개최한 창홀경연(唱笏競演)에 함가한 한국선비문화학회 회원들과 함께 옥산서원을 찾게 된 것이다. 큰 들판 가운데로 곧게 뻗은 길을 달리기 30여 분만에 서원 입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500여미터를 옥산천을 따라 오르자 옥산서원의 외삼문인 “또한 즐겁지 않은가?”라는 뜻의 역락문(亦樂門)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이 현판은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였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의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에서 인용된 것이다.
역락문을 지나면 무변루(無邊樓)가 다가서고 무변루 맞은편에 이 서원의 중심 건물이자, 강학공간인 구인당(求仁堂)이 자리 잡고 있다. 구인당의 양쪽으로 동재인 은수재(誾修齋)와 서재인 민구재(敏求齋)를 두고 있고, 강당 뒤쪽에는 제의공간인 사당(祠堂) 체인묘(體仁廟)가 자리하고 있다.
일행은 경주향교에서 창홀 때 입었던 도포와 당의를 환복하지 않고 그대로 입고 구인당 대청에 앉아 차를 마시며 회재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니 우리는 마치 옛 선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문득 회재선생의 한시 ‘무위(無爲)’가 떠올랐다. 북경 자금성 안 황후가 거처하는 교태전(交泰殿)에서 본 무위(無爲)라는 글자를 본 순간 떠올렸던 회재의 그 한시 제목인 것이다. 무위는 직역하면 "아무 일도 말라"이나 의역하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재의 다음 ‘무위(無爲)’에서 보면 "사리(事理)를 거슬러 억지로 하지 말라는 뜻으로 무작위(無作爲) 하는 가운데 순천리(順天理)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萬物變遷無定態 一身閑寂自隨時
만물변천무정태 일신한적자수시
年來漸省經營力 長對靑山不賦詩
년래점생경영력 장대청산불부시
의역하면, 천지 만물은 때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변천하는 자연에 순응함에 따라 이 한 몸 한적(閒適)을 즐긴다. 한적함이 몸에 배게 되자, 노력하여 억지로 뜻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고집스러움도 줄어들었다. 이제 매사 자연의 순리에 따르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지경이라 푸른 산을 마주하고도 시(詩)를 짓지 않는다.
옥산서원은 산수도 좋지만 현판(懸板)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옥산서원의 강당 이름은 본래 인(仁)을 구(求)하는 집(堂)이란 뜻의 구인당(求仁堂)이 강당 안 북벽에 걸려 있고, 이 건물 밖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있고, 또 다른 옥산서원 현판이 북벽 맞은편에 걸려 있다. 안쪽에 걸린 현판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썼다고 한다. 강당 앞에서 바라 보니, 강당인 무변루(無邊樓) 위로 도덕산(道德山)이 걸려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다.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도 다른 이름이 있다. 동재는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민구재(敏求齋)이고, 온화한 가운데 공부하라는 은수재(誾修齋)이다. 누각 이름은 변(邊)이 없다는 무변루(無邊樓)이다. 무변은 풍월무변(風月無邊)에서 따왔다고 한다. 풍월이 경계가 없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사당의 이름은 인(仁)의 몸통이라는 체인묘(體仁廟)이다.
강당 안에 걸린 다른 현판도 유학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 하나가 "함께 서자"라는 해립재(偕立齋)다. 공부자께서는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했다. 여기 유생들은 함께 입지를 세우자고 했다. 해립재 현판 옆에 작은 글씨도 유생들은 한 치 흔들림 없이 경(敬), 직(直), 의(義)를 내외로 굳게 하고 서로 나누며, 하늘의 빛나는 덕을 잊지 말고 지키라(敬直義方內外交相 惟操弗忘天德之光)고 했다.
구인재 뒤편에 사당인 체인당에는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했고 읍례로 예를 표했다. 그 체인당 서쪽에는 회재 이언적의 신도비가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일행은 옥산서원을 나와 옥산천 외나무다리를 지나 10여분 걸어서 회재의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에 도착했다. 혼자 있으면서도 즐겁다는 독락(獨樂)에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간다(君子愼其獨也)의 공자님 말씀이 떠올랐다. 독락당은 문이 잠겨 들어 갈 수 없었고, 옥산천변에 있는 독락당의 누각인 인지헌(仁智軒)만 보았다. 인지헌의 아래는 옥산천이 굽어 흐르고 고목이 천변으로 가득한 풍광이니 정자가 있을 만한 자리에 있었다. 독락당 안에는 경청재(敬淸齋)가 있으나 회재 후손이 거주하는 사적 공간이라 문은 닫혀 있었다. 경청재는 회재의 손자 이준과 이순 두 형제가 조부께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자, 청백(淸白)은 공경지심(恭敬之心)에서 나온다고 하여 1601년에 이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도덕산 아래 옥산천은 쉼 없이 흐르고, 그 가운데 자리 잡은 옥산서원에는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이 500년이 지난 지금도 도(道)가 잠시도 떠나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흐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이다. 숲이 그윽한 옥산천을 따라 올라 간다.
옥산서원의 외삼문인 역락문이다.
우리 일행은 구인당 대청에서 차를 마시면 담소하고 있다.
본 서원의 강당 건물의 이름인 구인당 현판이다.
강당 건물의 밖에 걸린 현판 옥산서원 현판이다.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이다.
본 서원의 이름이 옥산서원이다. 이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모두 같이 입신하자는 해립재 현판이다.
구인재에서 바라니 무면루 위에 본 서원의 주산인 도덕산이 보인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신도비이다.
일행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옥산서원 방문을 마치고 독락당으로 가려고 옥산천의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다.
독락당 사랑채인 인지헌 앞이다. 인지헌 앞에는 옥산천이 굽이 흐르고 있다.
인지헌 앞에 흐르는 옥산천이다.
독락당 근처에 있는 정혜사지 13층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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