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원향교

1박2일 유교문화관광 기행문 (3. 우암 송시열 고택 방문)

by 仲林堂 김용헌 2016. 4. 17.


남간정사와 연못이다. 남간정사의 좌측칸은 온돌방이고, 우측은 대청이다. 대청 아래로 샘에서 흐르는 물길이 있다.


가운데 기둥하나만 옛 것이고 나머지는 거의 새 목재를 썼다.



거의 새로운 목재를 사용하여 중건했다.


동춘당 방문을 끝내고 다음 방문지는 우암 송시열 고택이다. 우암 고택 주차장에 도착하자 평일인데도 십 여대의 관광버스가 주차해 있었다. 고택은 우암사적공원으로 지정되어 생각했던 것 보다 그의 큰 인물됨에 맞춰서인가 규모가 컸다. 그가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고, 사후에 제자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펴냈던 남간정사(南澗精舍)을 먼저 만났다. 좌측은 방이고, 우측은 대청마루로 마루 아래로 샘에서 흘러 연못으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이런 정자는 나는 우리나라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연못에 섬 하나 만들고 왕버들을 심어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인 봉래산을 만들었다. 이 정사(精舍)는 근래 중건하여 새로운 건물 같이 보였으나 연못 위에 수 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남간정사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뒤쪽에 송부자가 직접 심은 배롱나무 한 그루가 허리가 휘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송부자(宋夫子)라는 푯말을 보니, 남이 나를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남간정사 뒤편에 있는 배롱나무 한 그루, 푯말은 송부자


정사(精舍)를 보니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을 썼다는 안동 회회마을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생각났다. 정사(精舍)는 저술활동을 했던 집이다. 인쇄를 위하여 목판에 새긴 게 장판이다. 우암이 쓴 송자대전 장판이 11,023개라고 하니 엄청난 규모다. 한 사람의 문집이 팔만대장경의 1/8이 넘는다. 송자대전의 초판은 숙종의 어명으로 금속활자로 간행되었고, 정조 어명으로 평양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또한 개인 문집이 아니라 어명으로 만든 문집이니 그 가치 또한 크다. 그러나 이 장판각은 충북 화양동에 보관되었다가 1819년 불 타 없어지고 1920년 남간정사에서 판각한 것이라고 한다. 후대에 재 판각해서 그런지 국가 지정문화재가 아니라 대전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비록 후대에 만든 것이지만 장판각에 보관하고 있었다 

목판이 11,023판이라고 쓴 안내판이다.

장판각 내부이다.

  

목판에 새긴 글씨가 보인다. 이 목판에 먹으로 묻힌다음 종이를 위로 올려 누르면 글자가 종이에 새겨진다. 글자가 새긴 종이를 철권하면 책이 된다.


다음 방문지는 우암역사공원 조성하면서 만든 사당이다. 사당의 문은 바르게 함을 밝힌다고 하는 명정문(明正門)이다. 명정문을 통과하니 커다란 5칸 집의 사당인 이직당(以直堂)이 눈에 들어왔다. 명정(明正)은 바름이요, 이직(以直)은 곧음이라 오직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의()만 쫒은 우암 정신이다. 우암은 제자 명재 윤증이 찾아와 자기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박세채의 글의 좋아 따라 했을 뿐이라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써줬다. 이는 탐탁하지 않은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다른 선비들과 함께 결사항전하여 결사하자고 했으나 그는 혼자 평복을 입고 빠져 나온 사실을 알고 있는 우암은 윤선거를 불충으로 보았던 것이다. 힘이 있는 제자의 부탁이지만 우암은 곧은 마음만 쫒았다. 정조를 비롯한 많은 유림들은 우암의 올 곧은 선비정신을 흠모했다. 하나의 일화로 강도지사(江道之事) 문어강도(問於江道)라고 "강화도일은 강화도에 물어 보라"고 전해지는 말은 우암의 곧은 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명정문(明正門)이다.


사당인 이직당(以直堂)이다. 건물도 일자로 곧다.  


우암박물관에 잠시 들려 효종이 북벌을 하려면 추위에 입을 털옷과 많은 우암 서적을 관람 후 나왔다.


우암 고택 방문을 하고 다시 우암을 생각해 본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은 횟수인 3,000번 이상이 나온다고 알려졌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문인의 모습은 전혀 없고 무사와 같은 부리부리한 얼굴이다. 그는 얼굴 모습과 달리 엄청난 저술을 한 문인이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다른 선현과 차별 없이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정조께서 가장 흠모했고 존경했다. 정조는 송자대전을 1795(정조 20) 정조(正祖)의 왕명에 의해 간행하였으며, 그 때 송시열을 송자(宋子)라 하여 국가적 차원의 성인으로 존숭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성인으로 높이 부른 분은 두 분으로 알려져 있다. 한 분은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安珦)이고, 다른 한 분이 바로 우암 송시열이다. 성현은 공자와 맹자와 같이 성(姓)에 자()를 붙인다. 안향은 안자(安子)라고 하고, 송시열은 송자(宋子)로 칭한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세월이 흐르며 점점 떨어지고 있다.  


학이 되어 나만 홀로 올 곧게 살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뛰어 든 그는 진흙탕 물도 묻었다. 그러나 누군가 노 젓는 사람이 있어야 배는 갈 수 있다. 바로 가려면 흔들림이 없이 나침판에 따라 가야 할 것이다. 때로는 유혹도 있으며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타협없이 자기 갈 길을 갔다. 전선에 뛰어든 우암은 공과를 이야기 하지만 그의 곧은 정신은 지금도 변함 없이 숭존해야 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