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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족 이야기

멸구 찾아 천리 길

by 仲林堂 김용헌 2015. 1. 11.

멸구 찾아  천리 길

 

   “빤짝 빤짝하는 거 보이는 겨라고 조선생이 묻지만 상남씨는 모르겠데이한다. 벼멸구란 놈은 형태가 작고, 흔한 흰등멸구와 애멸구와 뒤섞여 이것들과 구분하기가 쉬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애를 먹인다. 벼멸구를 찾기 위해 우리 일행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24일 봉고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 일행은 이론에 밝고, 현장을 뛰는 것을 즐기는 한박사, 회계를 담당한 김총무, 무한 체력의 최박사, 축구를 잘한다는 만태형, 상냥한 안내원 상남씨, 이천리를 책임진 김기사 그리고 반장 나였다. 이 외에 경남의 조선생과 경북의 이선생이 두 지역에서 동행했다.

   우리가 탄 봉고차는 혼잡하기로 이름난 수원역을 빠져 나와 단숨에 오산을 지나 고속도로를 달렸다. 잠시 눈을 부치는 가 했더니, 금새 청주IC에 도착하였다. 청주IC를 나왔다. 조치원 쪽으로 2km쯤 더 가서 좌측으로 난 포장도로를 1km 정도 가서 내렸다. 2년 전에 잠시 논에 들어 간 일이 있었지만 장도(壯途)의 멸구출장은 10년 만에 처음이었다. 노란 장화를 꺼내 신으니 옛 생각이 났다. 푹푹 찌는 더위에 빠지는 논에 들어가도 어쩌다 운이 좋아야 찾는 벼멸구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논바닥의 벼를 헤치며 돌아다니는 일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힘에 부치다 보니 매번 한 두 사람은 배탈이 나 차에 드러누워 끌려 다니기가 일쑤였다. 벼멸구 출장이란 피서철에 남해안을 도는 여행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삼복더위에 논바닥을 기는 것이 공무원 최면을 구기는 일 일뿐만 아니라 중노동으로 고달픈 출장이다. 조사방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금의 조사 방법이 10년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필지 당 30주 조사가 20주로 줄어든 것뿐이었다. 한 지역에 20여 필지를 조사하여 발생 필지를 조사하고, 20주당 마리 수와 주당 최고 마리 수를 조사한다. 유아등에 잡히는 숫자로 발생 예측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포장에 얼마나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벼멸구는 매년 6월말부터 7월에 중국에서 날라 와 벼를 가해하여 피해를 주게 되는데 7월 하순 포장 조사에 의한 발생예측은 그 해의 발생 정도 예측에 아주 중요하다.

   예상했던 것 같이 청주IC 옆에서 첫 조사는 흰등멸구도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아마 농약을 사용한 듯했다. 금년에는 잎 도열병 발생이 많아 벼멸구약도 도열병 방제할 때 섞어 뿌리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흰등멸구도 발견하기 어렵다면 벼멸구 방제는 전혀 할 필요가 없는데 많은 농민이 불필요한 농약을 너무 사용하고 있다. 농약의 과다 사용은 농민의 잘못도 있지만 농약사용을 지도하는 우리의 책임도 크다 할 수 있다. 한 톨이라도 더 먹으려는 욕심으로 해충이 발생되기만 하면 다 없애 버리려고 한 것이 생태계를 망쳐버려 농약 없는 농사가 곤란하게 되었다. 한 번의 농약으로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려다 보니 우선은 대상 해충을 잡아 효과가 좋지만 이와 같이 수년 또는 수십 년 반복하면 계속적인 농약 사용이 불가피하고,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생겨난다. 농약의 부작용은 먹이사슬을 없애 버리는 것이 가장 문제 중 하나 이다. 자연 생태계에는 먹이 사슬이 있어 해충이 수백 개에서 수천 개의 자손을 생산하지만 다음세대에는 다른 생물에 잡혀 먹히거나 기생 당하고, 병들어 죽고, 더위나 추위, 빗물 등 자연 재해에 의하여 거의 죽고 살아 남는 것은 한 두 마리가 보통이다. 다음으로 농약에 잘 죽지 않는 강한 놈만 살아 남아 더 많은 농약을 사용해야만 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청원에서는 보이는 것이 거의 없어 쉽게 조사를 끝내고 다음 목적지인 옥천으로 향했다. 옥천IC를 빠져 나와 보온 방향으로 2km 지나 차를 세우려 하자 최박사가 스타킹을 사야한다고 했다. 멸구조사에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 같이 몇 가지 필수품이 있다. 벼 포기 아래를 조사해야 하므로 벼를 양 팔로 헤쳐야한다. 반소매 옷을 입고 벼를 젖히면 살을 베개 되어 긴소매 옷을 입는 것이 보통이나 스타킹을 팔뚝에 껴 피부를 보호하기도 한다. 그 외에 벼멸구와 이와 비슷한 것을 잡기 위한 흡충관과 소형병이 필요하고, 무릎 위로 올라가는 노란 장화 착용은 필수다. 비가 많이 왔으나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물이 바로 빠져나가 별반 피해는 없어 보였다. 농가 사이에 있는 논에 들어가 이리 저리 벼 포기를 뒤져 보았지만 벼멸구는 보일 기미가 없었고, 3-4령 된 흰등멸구만 몇 마리 있었다. 내가 조사한 3필지를 포함하여 우리 일행이 15필지를 조사했지만 마찬가지로 예년에 비해 벼멸구는 거의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 3번째 목적지인 영동으로 향했다.

   영동IC를 막 나와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2km가서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논으로 들어가려 하자 저 멀리 초등학교 앞 나무 밑에서 맥주를 먹던 농민이 왜 들어가냐고 못 마땅한 듯한 큰 소리로 말했다. 멸구가 얼마나 나오는가 보려한다고 하자 일어나 올 듯 하더니만 다시 앉았다. 우리가 그간 멸구 예찰을 하여 농민에게 정말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늘 농약을 치라고 했을 뿐이었다. 멸구의 발생은 몇 해에 한번씩 나오는 것인데 매년 농약을 치라고 했으니 우리의 지도가 틀린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반성해보았다. 이렇게 수년을 지내다보니 우리는 양치는 목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늑대가 온다고 여러 차례 거짓말을 했던 목동이 정말 늑대가 왔을 때 늑대가 왔다고 해도 누구도 믿지 않았듯이 벼멸구가 온다고 해도 별 관심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옥천에서도 벼멸구는 전혀 발견 할 수 없었고, 흰등멸구도 주당 최고가 10마리 미만으로 금년에는 멸구가 별로 없으니 멸구약은 안쳐도 될 것이라고 하고 논 주인이 왔으면 말해 줬을 것이다.

해는 기울어 그림자가 길게 누울 때 김천에 도착하였다. 해가 질려면 멀었어도, 논바닦의 벼 포기 밑은 잘 모이질 않아 조사를 서둘려야 했다. 김천 시내를 나와 거창 방면으로 가다 보면 몇 년전에 만든 인공 폭포가 길을 막고 있다. 차는 이곳을 지나자마자 좌회전하여 농로로 들어가 멈추었다. 이곳은 경북 땅이지만 충북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18필지를 조사했지만 흰등멸구도 주당 최고가 10마리를 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첫날 조사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차는 거창으로 향했다. 몇 차례 눈을 붙여 더 이상의 잠은 없는 듯 멸구 이야기가 이어졌다. 상남씨는 올 해는 흰등멸구는 많이 날아오는데 벼멸구는 기록적으로 유아등에 적게 잡힌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벼멸구가 잡히질 않아 일본농약() 사람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했다. 그 원인이 중국에서 잡종벼를 심어서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내가 그 원인을 보충 설명해주었다. 중국의 양자강 이남은 인디카형의 벼를 재배하는 곳이며 이곳은 2모작 지대로 6-7월이 1모작벼의 수확 시기이다. 이때 벼 수확기에 기압골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걸치면 멸구는 비산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날라 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양즈강 이남의 잡종벼가 벼멸구 저항성 품종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벼를 많이 심을 때 많은 통일계 품종이 벼멸구 저항성 품종이었다. 그 때 한강찰벼 등 벼멸구 저항성 품종은 벼멸구가 거의 발견할 수 없을 정도 였지만 흰등멸구의 발생은 심했다. 중국에서 벼멸구 저항성 품종 재배는 확대될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수년 동안은 벼멸구 문제는 없어 질 것으로 생각된다. 벼멸구 문제는 남부해안 지역에 국한시키고 흰등멸구 방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벼멸구 생태형 출현 등 발생 생태에 관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박사는 벼멸구의 착륙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벼멸구 스스로 착륙하고 싶을 때하며 착륙한 후 정착하기 좋은 곳으로 재 비산하는 것 같다고 했다. “멸구가 공중에서 벼를 알아 볼 수 있을 까, 그리고 2모작 벼도 구분할 수 있고, 정착에 유리한 곳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까도 의문이었다. 스스로 착륙한다면 논 면적이 많은 평야 지대 보다 논 면적이 적은 골자기에 집중 착륙할 수 있고 주변 푸른 곳에 착륙한다면 논으로 재 비래하면 평야지대의 논보다 골짜기 논에 많이 비래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의문은 벼멸구가 산을 넘은 다음 많이 비래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인지 의문이었다.

   김천을 떠나 한 시간만에 거창에 도착하였다. 거창은 사과로 유명한 곳이지만 사과는 딸기, 오렌지 등이 나오면서 맛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여 사과 농사를 포기하고 딸기 농사를 하는 사람이 많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와 같은 날 태어난 정열씨이다. 정열씨는 딸기수출 회사의 믿을 만한 현지인 이다. 이곳은 딸기 해충의 천적을 연구하는 나와 관계가 많은 곳으로 이곳에는 딸기 수출 회사가 천적생산회사를 세우고 있다. 이 회사의 우동씨와 덕기씨를 2달만에 다시 만났다. 비닐하우스도 3동 새로 지었고, 컨테이너 위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차광망을 설치하는 등 많은 투자를 한 듯 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가야할 길이라고 나선 이 사람들에게 최선의 지원을 보낼 것을 다짐하며 성원을 보낸다. 815일 개업을 한다고 했다. 그 날은 농약만 의존해 왔던 우리 농업이 농약에서 벗어나 천적을 이용한 생물적 방제로 전환하는 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벼멸구 출장의 저녁은 또 하나의 일과이다. 고생스런 낮을 보내니 술로 회포를 풀게 되기 일수다. 밤은 술, 노래, 여자가 있으니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든다. 오늘도 역시 12시가 지나서 여관에 들어와 여장을 풀었다.

   경상도에 오면 먹거리가 늘 걱정인데 둘째날 아침은 순두부 전문식당을 만나 아침 식사를 잘 했다. 거창읍에서 가조 방향의 딸기 재배지대로 차를 돌렸다. 오늘도 어제 못지 않게 햇살이 부시였다. 이곳의 멸구 발생은 어제 조사한 곳들과 유사했다. 우리 일행도 멸구 출장 경험이 많지 않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어 알려 주었지만 몇 차례의 교육으로 충분치는 못했다.

   거창 다음은 진주였지만 진주 대신에 남해를 보기로 하고 산청으로 향했다. 차는 88고속도로를 올라 함양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 고속도로에서는 반대방향에서 오는 경찰이 잡는다고 내가 말한 지 3분도 채 안되어 고속도로 순찰차가 라이트를 키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노란 장화를 신고 있던 상남씨가 내려 사정하니 주의만 주고 보내 주었다. 경찰도 노랑장화 신고 멸구 예찰을 하러 다니는 것을 알면 거의 정상을 참작했다.

   산청IC에서 경남의 조선생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오기 전에 들었던 사람이다. 혼자서 예찰, 작물보호, 친환경 등 여러 가지 일을 다 맡고 있지만 일을 겁먹지 않고 무던히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상남씨의 칭찬이다. 이제부터는 조선생 차가 선도했다. 산청IC를 지나 단성면에 도착했다. 산청은 지리산 앞자락에 있는 산골이지만 단성에는 큰 들이 있었다. 우리 차는 경지정리가 잘된 들판 한 가운데의 다리 위에 세웠다. 다리 위 에 세우면 4명이 각기 다른 곳으로 흩어져 조사 할 수 있어 좋았다. 이곳에서도 역시 벼멸구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흰등멸구가 주당최고 100마리로 많이 발생한 것을 처음 보았다. 산청에서 벼멸구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음 목적지인 하동에서는 꼭 벼멸구를 찾자고 일행에게 말했다. 산청 단성에서 하동 가는 길은 지리산 자락 밑으로 굽이굽이 나있어 시골 풍경을 보기에 좋은 길이다. 두레박을 사용하는 우물도, 솟을대문이 있는 한옥도 보였다. 얼마를 지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동은 벼물바구미가 우리나라에 처음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벼물바구미는 이곳에서부터 매년 확산되어 지금은 전국에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11시 반쯤 진교면 계단식 논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논에 들어가 한 참 조사중 일 때 갤로퍼 한대가 우리가 쪽으로 올라 왔다. 차 뒤에 표시한 마크를 보니 농촌진흥청에서 병해충예찰 잘 하라고 사준 차로 보였다. 차 뒤쪽에는 먼지 낀 농약사용지침서 등 몇 권의 책이 보고, 현미경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자가 있었다. 차에 현미경을 싣고 다니는 것이 현실성이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하동군의 과장과 예찰담당자가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이다. 내가 장화를 신은 것이 거북한 듯 그 과장은 장화를 벗을 것을 권했다. 농업기술센터의 과장이 벼멸구 예찰을 한다는 것은 격에 맞질 안는 듯 했다. 하동에서 벼멸구를 찾자고 했지만 결과는 실망이고 흰등멸구 발생이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동에서 조사를 마치고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중 한 곳인 노량 앞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차는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읍을 지나 계속 달려 북쪽으로 바다가 보이는 이동면 들에 도착하였다. 남해는 마늘이 유명한 고장이다. 이곳에서는 논에 마늘을 심고 그 후작으로 벼를 재배한다. 마을이 끊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곳은 인구밀도가 높아 보였다. 아마 벌이가 좋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이 살거라 짐작을 해보았다. 중국 마늘이 밀려 올 것을 생각하니 앞으로 마늘을 대체할 추천 작물이 과연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이 문제는 남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농민의 앞으로 살아갈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쓸쓸했다. 흰등멸구가 이렇게 많으면 벼멸구가 같이 있을 듯 했지만 벼멸구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해에서 우리 일행은 처음 벼멸구를 찾았다. 조선생이 잡아 온 벼멸구를 보여 줬다. 3-4령 약충 이었다. 최박사도 4령충 한 마리를 잡아 이 번 출장의 체면은 유지한 듯 싶었다. 흰등멸구 발생은 이곳도 많았다. 주당최고가 30마리 이상이 되는 필지가 총 20개 조사 필지 중 8필지이니 가볍게 볼 흰등멸구가 아니었다. 흰등멸구는 815일 이후에는 어디론가 다 날라 가버려 별 피해를 주지 않으므로 그 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시 남해대교로 가지 않고 곧 바로 창성대교를 지나 선착장으로 갔다. 한 배에 16대의 차를 싣을 수 있었으며 배는 20분 간격으로 출항했다. 이곳에서 저 멀리 삼천포항이 보였다. 당항에서 삼천포까지 새로운 연륙교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 규모가 대단해 보였다. 얕은 산은 깎아 내버리고, 좀 높으면 굴을 뚫고, 강이나 바다가 있으면 다리를 놓고 날로 건축기술은 발전하여 못 가는 곳이 없는 듯 했다. 이곳 선착장도 사라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한 배를 보내고 다음 배에 우리는 승선했다. 바다를 모르고 육지에만 사는 사람들에게 푸른 바다를 보기만 해도 시원한 희망을 주는 곳이다.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떠서 저 멀리 바라보는 것은 더욱 즐거운 일이다.

차는 삼천포항을 바로 나와 사천 쪽으로 가다가 삼천포읍에서 백천면 경계 지점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올라 저수지가 있는 곳까지 계속 올라가서 차를 세웠다. 마을 앞 정자 밑에 할머니들이 10여명 앉아 있었다. 시골에는 오래 사는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을 제치고 정자 밑을 차지하고 있었다. 멸구가 있는지 보러 왔다하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아 멸구 때문에 고생이 그간 많았던 곳이라고 직감적으로 생각이 들었다. 올해 지난 7월 중순까지 가뭄이 심했다. 늦게 심은 벼는 키가 크지를 못했다. 아마 못자리 논인 것 같은데 흰등멸구 발생이 많아 농약을 친 듯 했으나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한 포기에 20-30리씩 보였다. 멸구가 많이 발생하는 해는 농민들은 농약을 의심한다. 농약을 쳤는데 벌레가 영 죽질 안는다고 불평한다. 많은 경우 농약의 약효가 없어서가 아니라 농약을 충분히 뿌리지 못했을 경우가 많다. 멸구는 벼 포기 아래에 있으므로 약액이 흐를 정도로 뿌려야 효과가 있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곳에서 벼멸구를 처음 발견했다. 4-5령 약충이 3마리 보였고, 갓 우화한 단시형 암컷을 2마리 찾았다. 차를 타고 나와 우리 일행을 만나니 사천농업기술센터에서 여러 사람이 나와 있었다. 이들은 흡충관으로 잡은 멸구를 보여 주며 벼멸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잡은 것은 애멸구 약충과 흰등멸구 단시형 암컷이 대부분이었고 벼멸구는 한 마리도 없었다. 이 지역은 벼멸구 상습 발생지역이지만 아직 벼멸구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병해충 분야가 큰 문제였으며, 지도와 행정이 통합되면서 예찰 분야가 무너지고 있는 현장을 보는 듯했다.

   멸구의 감별은 자기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광택이 보인다고 하고, 형광물질이 있다는 사람도 있다. 내가 보는 멸구감별법은 다음과 같다. 벼멸구 약충은 갈색으로 몸 전체에 흰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 흰등멸구와 구분할 수 있다. 애멸구 약충은 몸의 좌측과 우측이 짙은 색이며 가운데는 옅은 색을 띄며 벼멸구는 복부 쪽은 흰 점이 있으나 머리가슴 쪽에는 갈색으로 단색으로 상하가 색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흰등멸구 단시형 암컷은 검은 색을 띄고, 자세히 보면 옅게 소순판에 흰줄이 나있다. 애멸구 단시형 암컷은 다른 멸구 보다 작고 소순판이 노란색을 많이 띈다. 벼멸구 장시 암컷은 등에 세로 줄이 없는 반면 애멸구는 노란 세로줄이 있고, 흰등멸구도 흰 세로줄이 있어 구분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은 착안점을 가지고 실물을 여러 차례 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감별특징을 터득하는 것이 멸구 감별의 지름길이다.

   고성은 ‘96년부터 한박사가 온실가루이좀벌의 기술이전에 애쓴 곳으로 전국의 20개 천적시범사업 중 둘째가는 송선생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차를 세운 곳은 고성 상리면 부포라는 곳으로 매년 농약을 살포해도 피해가 나서 올해는 건축골재처리장으로 허가를 해주었다고 했다. 이곳은 대부분 농약을 몇 일전에 살포한 듯 했다. 흰등멸구 시체가 물에 가득 깔려 있었다. 벼멸구가 있을 만했지만 발견을 할 수 없었다. 고성의 다른 한 곳을 더 보기로 했다. 고성농업기술센터의 이과장과 송선생이 멸구 발생으로 유명한 남쪽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고성읍 거운리로 벼 종합방제사업 교육시범장으로 이용했던 벼멸구 발생이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벼멸구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옥수수 밭 사이에 있는 논에서 흰등멸구의 피해가 난 곳을 처음 발견했다. 흰등멸구의 7월말 8월초의 피해는 벼멸구가 폭탄이 떨어진 것 같이 벼가 말라죽어 쓰러지는 증상과 달리 잎은 황색으로 변하고 키가 크지를 못한다. 엽초는 구침으로 빨아먹을 때 찌른 자국으로 도관이 상처를 받아 노란 색으로 변한다. 농민이 노랑벼가 되어 약을 쳤다는 것은 흰등멸구 피해가 심한 경우이다. 벼멸구나 흰등멸구의 밀도가 높으면 멸구의 배설물(감로)이 나와 손으로 잡으면 끈적거린다. 고성농업기술센터 이 과장과 천적사업에 관하여 얘기했다. 온실가루이좀벌 생산 문제는 없지만 농가에 적용할 때 다른 병해충 발생 시 문제점의 해결이 어렵다고 했다. 더 많은 농가의 실증실험이 필요했다.

통영은 다음날 조사하기로 하고 류소장이 있는 거제로 행했다. 통영 쪽으로 접어들자 길은 4차선이었다. 남쪽 섬으로 향해 가고 있지만 점차 도회지로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게제도는 삼성조선소와 대우조선소가 시골의 외로운 섬을 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제주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큰 섬이며 인구는 17만이라고 했다. 거제는 포로수용소의 슬픈 과거가 있지만 지금은 공업발전의 좋은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조선공업이 발전하고 있는 희망찬 곳이었다. 공업의 입지조건뿐만 아니라 거제도는 농업도 교통의 발달로 더 이상의 오지가 아니며 따뜻한 기후가 농사짓기에도 적합한 곳이었다. 여러 가지 지형이 다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유소장님은 저녁식사에 없었지만 게제도농업기술센터 직원과 함께 생선회를 먹었다. 피곤한 탓인지 몇 잔의 술로 쉽게 취했다. 유소장님이 여관으로 찾아와 맥주를 나누며 어려운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추어탕으로 아침식사를 한 후 거제의 남쪽 도시 학동으로 가면서 저 멀리 떠 있는 외도를 보았고, 거제의 아름다운 해안선 700리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농업기술센터의 포장과 시설을 방문했다. 우리 연구소 보다 훌륭한 시설에 자원식물, 150종이상의 동백품종은 인상적이었지만 장미 재배온실 등 다른 시설의 이용은 다른 농업기술센터와 비슷했다. 이 소장은 이 좋은 환경에 천적을 키운다면 좋겠지만 일할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지방화 되면서 농촌지도 인력의 감원이 심각한 문제였다.

   통영에는 벼멸구 도사 조선생이 발생하는 곳을 미리 찍어둔 곳이 있다. 이곳은 매년 벼멸구에 의한 피해가 나오는 곳이며 다른 곳보다 항상 먼저 피해가 나오는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만 오면 벼멸구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선생은 우리가 오기 몇일 전 이곳에 와서 벼멸구 발생을 확인하였다고 했다. 조선생은 이번에도 지난번 확인한 곳에서 벼멸구 3-5령 약충을 30마리 정도 잡아 가지고 나왔다. 벼멸구가 상습적으로 발생하는 곳은 지형상 특이한 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곳은 북쪽으로는 약 300미터의 폭으로 3-4km의 논이 계속되고 그 위에 저수지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이번에 벼멸구가 잡힌 곳으로 동쪽으로 폭이 100m되는 골짜기가 300m 뻗어 있었다. 추측컨대 기류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곳의 앞에 산이 막히거나 더 가면 바다인 곳으로 이곳에 착륙 못하면 더 이상 새로운 착륙 기회가 없는 곳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통영에서 함안까지는 먼 길이다. 마산 쪽에서 가야 쪽으로 가는 도중 여향산이 앞 골짜기에서 조사를 했다. 이곳은 산간 지역으로 큰 느티나무가 들 가운데 있는 곳을 중심으로 조사했다. 여기에서는 벼멸구는 발견 못했지만 하동 못지 않게 흰등멸구 발생이 많았다. 다음 목적지는 창녕이었다. 창녕에서 밀양과 청도 방향으로 가다 보면 고갯마루에 고분군이 나타났다. 그 아래에서 조사한 결과 흰등멸구는 비교적 많았으나 벼멸구는 없었다. 그간 천리 길을 안내했던 조선생은 여기서 작별을 하고 우리는 천장재를 넘었다.

이제 밀양이 멀지 않겠거니 했으나 얼마 못 가 천왕재가 앞을 막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면 옛 사람이 이곳을 넘은 사람은 몇 사람이 될까 생각해보니 지금 차를 타고 넘는 우리들은 지금 세상에 태어나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양에 오면 첫째 어마어마한 시청청사에 놀라고, 하루 종일 막히는 구 도심의 교통난에 놀라고, 셋째 넓은 들에 놀란다고 했다. 천장재를 넘자 어디에 들이 있을 까 했으나 밀양시까지 20여리 길이 완전 평야였다. 이곳에서는 흰등멸구도 발견이 쉽지 않을 정도로 멸구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북쪽으로 달려 해질 무렵 청도에 도착하였다. 경북농업기술원에서 나온 이선생을 어렵게 만났다. 여장을 푼 다음 저녁식사를 했다. 원래 술을 못하는 한박사를 제외하고 모두 술을 잘 했다. 술을 잘 했기 때문에 힘겨운 일도 잘 참아낼 수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청도는 자체 조사 결과 벼멸구 발생 필지 비율이 13%라고 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진 지역이었으나 조사결과 전혀 벼멸구 발생은 없었다. 다른 곳의 발생 여지를 보기 위해 용암온천 부근에서 한번 더 조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군 담당자가 같이 왔으면 설명을 해주고 싶었지만 다른 행사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이곳은 배우려는 의지도 없어 보여 안타까웠다. 경산에서 영천 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참외시설 하우스 지대에서 조사를 했다. 이곳은 도시 인근으로 평야지대였다. 경남 지역과 달리 흰등멸구 발생도 많지 않았다. 이번 여로의 마지막 장소 영천으로 갔다. 우리를 기다리는 영천농업기술센터의 이계장과 담당자를 만났다. 이곳도 자체 조사 결과 벼멸구 발생율이 34%라고 하여 확인 대상 지역이었다. 예찰을 몇 년 했다지만 이곳 사람들 역시 벼멸구를 모르고 있었다. 애멸구의 단시형 암컷과 흰등멸구의 단시형 암컷을 벼멸구인줄 알고 있었다.

   차는 경부고속도로의 영천IC를 지나 우리의 종착역인 수원으로 행해 달려갔다. 우리는 벼멸구를 찾아 2천리 길을 헤맸지만 4곳에서 벼멸구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차는 어렵고 힘든 길을 무사히 달려 금년에 벼멸구 발생이 많지 않을 것이란 귀중한 사실을 싣고 왔다. 2000. 7. 31 김용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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