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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신미양요 때 조선군이 패전한 광성보

by 仲林堂 김용헌 2014. 10. 16.

강화도는 개성의 관문이며 한양의 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이 처들어 왔고, 조선시대에는 청나라, 미국, 일본 등 세계의 열강들이 침입했을 때 우리의 많은 선조들이 목숨받쳐 싸운 곳이다. 광산김씨 대종회 단합대회 참석한 전국종친회 임원들은 전등사를 방문하고 이곳 광성보(廣城堡)를 방문했다. 광성보는 아래 사진 설명에서 나와 있듯이 강화도에 설치한 해안 방어수비 진지이다.

 

광성보는 강화섬과 육지와 맞 닿은 중간쯤 강화섬 해안에 위치해 있다. 광성보 입구에 있는 성루(樓)안해루(按海樓)가 아주 크다. 안해루는 바다를 다스리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안해루를 지나니 바로 빠른 물살이 흐르는 바다가 보였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는 협곡으로 조수의 간만의 차가 아주 심한 이곳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좁은 협곡의 바다라서 섬과 육지에서 설치해 놓은 포를 쏘아 적을 공격하기 좋은 곳이다. 몽고군과 청나라 군대는 빠른 물살로 강화도 침입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결국은 군사가 중과부족으로 패하여 강화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미군과 일본군에는 더 이상 방어진지가 될 수 없었다. 특히 병인양요 때 미군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당시에는 엄청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함에 함포를 장착하여 군사 450명이 이곳 광성보를 침입하자 어연재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50명은 항전했으나 우리가 쏜 홍이포는 소리만 요란했을 뿐 미군함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하였으나 미군의 함포는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무기에 우리 조선군은 350여명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전멸했다. 반면 미군은 3명이 사망하였으며 이 중에서 단 1명만이 전투로 사망했고 2명은 다른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한 그 1명이 미국육군사관학교 출신 최초 전사자라고 알려 졌다. 

 

신미양요 때 조선은 전투력에서 미국과 싸울 상대가 못되면서도 죽기로 싸우며 화평하지 않았다. 미군이 조선군을 초토화 시킨 후 이틀만에 영종도로 물러나자 조선은 오히려 미군을 물리첬다면서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세계정세에 어두었던 당시 무모한 전쟁은 패전할 수 밖에 없었다. 패전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마땅하나 조선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패전을 받아들이고 부국 강병의 미국으로부터 실리를 배우고 국력을 쌓았다면 일본의 침략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다.  

 

이제 그런 역사가 반복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 유비무환으로 국력을 쌓아야함을 다시 되새기면서,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안해루 안으로 들어 가고 있다.  

안해루 앞에 있는 광성보 안내판이다.

안해루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바다가 보인다. 건너편은 김포 땅이다. 건너편에도 방어진지가 있다. 양해안에서 포격을 하면 바다 가운데로 도망가나 바다 가운데는 암초가 많아 아주 위험하다. 흰 물살이 흐르는 곳이 암초가 있는 곳이다.

강화충렬사 도유사며 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김남중선생은 광산김씨로 이번 강화도 관광 시 명쾌한 해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쌍충비각은 두명의 충신 비석이 있는 건물이라는 뜻이다. 두분은 신미양요 때 이곳을 지킨 어연재 장군이고, 어장군의 친동생 어재순선생이다. 어재순 선생은 당시 군인이 아니었으나 형의 부대에 자원하여 같이 싸우다 전사를 하였다.  

신미양요 때 나라를 지키다 순국하신 무명용사의 비이다.

 

신미양요 때 전사한 병사들의 시체들이다. 미군이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

7기의 묘에 51인의 무명용사가 묻힌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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