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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화도 삼랑성(정족산성)

by 仲林堂 김용헌 2014. 10. 14.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이라고  하며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있다고 하여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 시설이었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라 칭해질 만큼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하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이 각각 제시되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종해루란 이름이 붙은 남문이 1976년 복원웠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성 안에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절 주변에는 1259년(고종 46)에 궁궐을 지었다고 전하는 고려가궐(高麗假闕)터가 있는데, 1264년(원종 5)에 불사(佛事)가 설행되어 원종이 친히 행차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1660년(현종 1)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사고가 정족산성 안으로 옮겨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라고 불렸는데, 이 때 왕실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가 한양을 방어하는 외곽 기지로 중시되면서, 고려가궐터에는 정조 때 정족진(鼎足鎭)의 군창(軍倉)인 정족창(鼎足倉)이 설치되었다. 그 뒤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이곳에서 두 나라 군사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용혁 글 발췌]

 

강화는 한반도의 문물이 들어 오는 관문이며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는 좁은 해안은 물살이 아주 세 외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요쇄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는 외적이 침입이 쉽지 않아 왕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고 중요 문서를 보관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강화섬 남쪽에 쌓은 정족산성은 외적 침입에 대한 2차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천혜의 섬이라고 하지만 몽고군이 처들어 왔고 근세에는 병인양요 때는 미군이 군함을 가지고 이곳을 침입하였으며,  일본도 침입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산성의 길이는 2.3km이고, 정족산 둘레에 있고 전등산은 산성의 가운데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 많은 산성이 있다. 대부분의 산성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고 허물어저 원형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복원하려면 고증을 거처야 하나 대부분의 산성 복원이 어떤 고증 없이 복원은 하여 오히려 원형을 파괴하게 된다. 너무 그럴듯한 모습의 삼랑성을 보니 어떤 고증없이 복원을 하지 안했을 가 하는 걱정이앞선다.

 

宗海樓는 바다가 있는 곳에서 왕실의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서 종해루라 이름을 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 안쪽에서 보면 앝으막하다.

아래는 사각형 돌이 많고 위에는 납작한 돌을 위에 올려 놓았다.

총안(銃眼)은 가까이 볼 수 있는 근총안은 없고 모두 멀리볼 수 있는 원총안(遠銃眼)이다.  

나무를 비켜 쌓았다.

밖에서 본 성은 사람 키 2배 이상으로 높다.

성의 처마 역활을 하는 미석(楣石)은 화강암으로 오래되지 않은 돌로 눈에 띤다.

종해루 동쪽편 성곽으로 제법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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