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이라고 하며 강화도 남쪽 해발 222m의 정족산(鼎足山)에 있다고 하여 정족산성으로도 불린다. 고려∼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 시설이었다. 흔히 “강도(江都)는 서울의 목구멍이고, 정족은 강도의 두뇌”라 칭해질 만큼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다.
강화는 한반도의 문물이 들어 오는 관문이며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강화도와 육지 사이는 좁은 해안은 물살이 아주 세 외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요쇄라고 할 수 있다. 강화도는 외적이 침입이 쉽지 않아 왕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고 중요 문서를 보관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강화섬 남쪽에 쌓은 정족산성은 외적 침입에 대한 2차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적이 침입하기 어려운 천혜의 섬이라고 하지만 몽고군이 처들어 왔고 근세에는 병인양요 때는 미군이 군함을 가지고 이곳을 침입하였으며, 일본도 침입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산성의 길이는 2.3km이고, 정족산 둘레에 있고 전등산은 산성의 가운데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수 많은 산성이 있다. 대부분의 산성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고 허물어저 원형을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복원하려면 고증을 거처야 하나 대부분의 산성 복원이 어떤 고증 없이 복원은 하여 오히려 원형을 파괴하게 된다. 너무 그럴듯한 모습의 삼랑성을 보니 어떤 고증없이 복원을 하지 안했을 가 하는 걱정이앞선다.
宗海樓는 바다가 있는 곳에서 왕실의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서 종해루라 이름을 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 안쪽에서 보면 앝으막하다.
아래는 사각형 돌이 많고 위에는 납작한 돌을 위에 올려 놓았다.
총안(銃眼)은 가까이 볼 수 있는 근총안은 없고 모두 멀리볼 수 있는 원총안(遠銃眼)이다.
나무를 비켜 쌓았다.
밖에서 본 성은 사람 키 2배 이상으로 높다.
성의 처마 역활을 하는 미석(楣石)은 화강암으로 오래되지 않은 돌로 눈에 띤다.
종해루 동쪽편 성곽으로 제법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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