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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전주이씨의 옛터 경기전

by 仲林堂 김용헌 2013. 9. 24.

이번 추석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와 전주한옥마을 다녀 왔다. 왕궁리는 궁궐이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오층석탑만 남아 있었고, 이와 반대로 전주는 비록 왕궁은 아니었지만 큰 도시로 수백년동안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융성하다가도 쇠퇴하는 도시의 역사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옛 시를 보면 서울이나 평양과 같이 아주 오랫동안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경상도를 대표하는 경주와 상주는 부산과 대구에 자리를 내줬고, 충청도를 대표하는 충주와 청주도 대전에게 밀렸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강릉과 원주도가 아니고 지금은 춘천이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왔으며, 나주는 광주에게 밀렸으나 전주는 지금도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무엇이 전주를 이렇게 오랫동안 큰 도시로 남아 있게 했을 가 궁금증은 다음의 6곳을 방문하고 바로 풀렸다. 그곳은 (1) 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慶基殿), (2) 700여명의 유림이 있다는 전주향교, (3)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이외의 4곳의 사고 모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 불타 없어졌지만 유일하게 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는 전주사고, (5) 판소리의 보존, (6) 100년이 넘은 전동천주교회이다.  한 지역에서 이런 전통을 한 가지만이라도 전통을 보존하였다면 자랑스런 일이지만 이곳은 여섯이나 있으니 전주의 자랑을 넘어 우리나라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 가? 

 

이 중에서 경기전 (慶基殿)에 관하여만 살펴본다. 경기전이라고 한글로 표현하면 바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경(慶)은 경사스런 경이고, 기(基)는 터기이고, 전(殿)은 전각(큰 집)이라는 뜻이다. 다시 자세히 풀이하면 "경사스런 터전이 있는 집"이다. 이 전각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가 보존되어 있다. 태조는 전주이씨로 태조의 5대조부께서 동북면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어진은 태종 10년(1410년)에 처음 만들어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 등 5곳에 보관하였다. 개성은 고려의 도읍, 전주는 태조의 고향, 함경도 영흥은 태조의 출생지, 경주는 신라의 도읍, 평양은 나라에서 2번째 큰 도시이다.이 어진은 임진왜란 때 전주를 제외한 4곳 모두 소실되어 전주만이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의 뿌리라고 여기는 전주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자긍심을 가지고 이 어진을 자랑스럽게 보존하였던 것으로 본다. 일제는 부속건물을 없애고 소학교를 세우는 등 조선의 뿌리가 되는 이곳 경지건을 훼손하였으나 근래 복원하였다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이 있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내삼문이 나온다.

 외삼문과 내삼문 모두 건물에 판액(현판)이 없다.

 

 

 어진이 있는 보관된 경기전 본전이다. 일자 건물에 전각을 덧댄 구조이다. 좌우에 회랑이 있어 궁전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앞 마당에는 놋쇠 그릇을 놓아 화재 시 물을 보관하여 방화를 대비하였다. 아마 어진이 비바람을 피하며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전각이 앞쪽으로 나와 있는 구조가 된 것 같다.

 

 건물 내부에 방을 만들었고 그 안에 어진을 보존하고 있다. 밖으로 나와 있는 상은 제사장이다.

 왕이 행차 시 사용하는 양산과 햇빛 가리개로 보인다.

 

 어진이 방안쪽에 있다. 이곳 어진은 사본이고 원본은 박물관에 보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가깝게 본 태조 이성계의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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