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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백제 왕궁의 비밀을 간직한 왕궁리삼층석탑

by 仲林堂 김용헌 2013. 9. 24.

이번 추석날 가족과 함께. 화창한 가을 날씨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국리 왕궁리5층석탑 유적지를 방문했다. 유적지는 얕으막한 야산에 있었다. 이름부터 왕궁리니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발굴한 집터만 보아도 수십만평은 되어지만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왕궁리5층석탑 하나뿐이다. 탑은 높이가 9미터로 아주 높다. 앞에서 가까이 보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가 좀 투박하고 거칠으나 멀리서 보면 균형 잘 잡히고 멋이 있는 걸작이다.

석탑의 처마 위 아래 차이가 작은 대표적인 백제탑 형태이다. 이 석탑건립 연대는 이견이 많다고 하나 통일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탑은 기울어 1965~1966년 해체 복원하였다. 그 때 탑속에서 금강경판과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사리함 속에 이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쓰인 금강경판이 나왔다. 그 글 중 첫문장은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新管精舍이다. 그 내용은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정사(사찰)을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무왕은.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백제는 의자왕 때 부여에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천도한 도읍 일가?하는 의문이 간다. 이 글이 사실과 맞다면 무왕때 왕궁리로 천도했다가 의자왕 때 다시 부여로 옮긴 것인가 아니면 무왕때 왕궁리에 도움을 건설하고 천도하려고만 했나 알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이 궁궐지라고 보는 또다른 이유는 금세공방이 궁궐지 안에 있다는 점이다. 금이란 귀중품 관리는 왕궁에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세음응험기 경판은 이곳이 백제왕궁이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터는 백제가 멸망하고 사찰로 바뀌고 그 후 농토가 되어 왕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 않았나 본다. 

 

왕궁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아 있고, 석탑은 천년을 넘어 그 자리에서 흥망 성쇠를 지켜보고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것은 수백년도 못가 벌써 사라졌다. 돌로 된 것도 수천년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되면 사라지게 된다. 이 왕궁터를 보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잠시 왔다 갈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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