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날 가족과 함께. 화창한 가을 날씨에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국리 왕궁리5층석탑 유적지를 방문했다. 유적지는 얕으막한 야산에 있었다. 이름부터 왕궁리니 왕궁이 있었던 곳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발굴한 집터만 보아도 수십만평은 되어지만 건축물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왕궁리5층석탑 하나뿐이다. 탑은 높이가 9미터로 아주 높다. 앞에서 가까이 보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가 좀 투박하고 거칠으나 멀리서 보면 균형 잘 잡히고 멋이 있는 걸작이다.
석탑의 처마 위 아래 차이가 작은 대표적인 백제탑 형태이다. 이 석탑건립 연대는 이견이 많다고 하나 통일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탑은 기울어 1965~1966년 해체 복원하였다. 그 때 탑속에서 금강경판과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사리함 속에 이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쓰인 금강경판이 나왔다. 그 글 중 첫문장은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新管精舍이다. 그 내용은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정사(사찰)을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무왕은.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백제는 의자왕 때 부여에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천도한 도읍 일가?하는 의문이 간다. 이 글이 사실과 맞다면 무왕때 왕궁리로 천도했다가 의자왕 때 다시 부여로 옮긴 것인가 아니면 무왕때 왕궁리에 도움을 건설하고 천도하려고만 했나 알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이 궁궐지라고 보는 또다른 이유는 금세공방이 궁궐지 안에 있다는 점이다. 금이란 귀중품 관리는 왕궁에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세음응험기 경판은 이곳이 백제왕궁이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터는 백제가 멸망하고 사찰로 바뀌고 그 후 농토가 되어 왕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 않았나 본다.
석탑의 처마 위 아래 차이가 작은 대표적인 백제탑 형태이다. 이 석탑건립 연대는 이견이 많다고 하나 통일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탑은 기울어 1965~1966년 해체 복원하였다. 그 때 탑속에서 금강경판과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 사리함 속에 이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라는 쓰인 금강경판이 나왔다. 그 글 중 첫문장은 百濟武廣王遷都枳慕蜜地新管精舍이다. 그 내용은 "백제 무광왕(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여 정사(사찰)을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무왕은.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백제는 의자왕 때 부여에서 멸망하였기 때문에 이곳이 천도한 도읍 일가?하는 의문이 간다. 이 글이 사실과 맞다면 무왕때 왕궁리로 천도했다가 의자왕 때 다시 부여로 옮긴 것인가 아니면 무왕때 왕궁리에 도움을 건설하고 천도하려고만 했나 알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이 궁궐지라고 보는 또다른 이유는 금세공방이 궁궐지 안에 있다는 점이다. 금이란 귀중품 관리는 왕궁에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세음응험기 경판은 이곳이 백제왕궁이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터는 백제가 멸망하고 사찰로 바뀌고 그 후 농토가 되어 왕궁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 않았나 본다.
왕궁은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아 있고, 석탑은 천년을 넘어 그 자리에서 흥망 성쇠를 지켜보고며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것은 수백년도 못가 벌써 사라졌다. 돌로 된 것도 수천년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되면 사라지게 된다. 이 왕궁터를 보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고 잠시 왔다 갈 뿐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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