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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사계 김장생선생 제사 참석기 (1)

by 仲林堂 김용헌 2013. 7. 30.

사계 김장생은 동국18현에 봉안되었으며, 영원히 사당에서 모시며 제사를 나라에서 허락한 불천위로 매년 기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계선생의 기제사일은 음력 8월2일인 양력으로 9월 9일이었다. 금년 379번째 기제사일이다. 사계 선생은 예학의 종장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적인 기제사예절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금번 처음으로 사계선생 기제사에 참석하여 제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계선생은 본처인 창령조씨로부터 3 아들을 두었고, 창령조씨가 돌아가신 후 순천김씨와 재혼하여 6아들을 두었다. 본처 소생세 아들 중 큰 아들은 임진왜란 중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손이 없고, 둘째가 신독재선생이시며, 세째가 허주공이다. 신독재 선생께서 본처에서는 손이 없고 후처에서 자손을 뒀다. 이런 이유로 신독재께서는 사계선생의 정통을 동생인 허주공에 있게 했다. 허주공 김반 후손에서 대제학 7명, 문과급제자 74명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졌다. 

 

사계선생의 제사는 하루 중 가장 고요하여 신을 모시기에 적당한 시간으로 생각되는 새벽3시에 시작한다. 서울에서 9월16일 오후 3시에 충무로 허주회관에서 모였다. 수원에서 전철을 타고 충무로역에서 내렸다. 장마도 지난지 오래지만 올해에는 무슨 날씨가 굳은지 연일 비가 내린다. 허주빌딩 회주회관에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10여명의 참배객이 미리 와 있었다. 지곡 선생께서 반갑게 맞아주며 나를 소개 해줬다. 안면이 있는 분도 몇 분이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초면이었다. 이곳에 오신 20명 중에서 방계는 나를 포함하여 공안공댁에서 1분과 한성좌윤공댁에서 1분이었고 그 외 모두 직계손이었다. 서울 시내 교통이 너무 복잡하여 30여분이 지연되어 버스는 3시반 허주회관을 출발하였다.

      

 오늘 기제사 장소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사계묘소역 아래에 있는 염수재이다.  버스가 고정리에 도착하자 비는 개인 날씨였다. 미리 도착한 참배객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산소를 행했다.

 

나는 버스에 내리자 먼저 왼편에 계신는 조상의 묘에 눈이 먼저 갔다. 능선에 판교공의 손자가 되는 참교공 방윤할아버지 묘소, 그 아래가 승지공 선휘할아버지 묘소, 통덕랑공 종길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다. 깔끔하게 벌초를 하여 맑끔한 모습이 시원하다. 사계묘역 바로 옆에 우리 직계선조의 묘소가 함께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서울에서 같이 온 일행이 허씨할머니묘소와 사계묘소를 참배하러 가고 있다. 곡담이 보이는 산소가 사계묘소이고, 그 아래가 허씨할머니 묘소이다.

먼저 허씨할머니 묘소에 참배를 한 후, 오늘 기제사가 있는 사계할아버지 묘소에 참배하려 하고 있다. 그 다음에 허씨할머니의 아들인 감찰공 묘에 참배를 했다.

허씨할머니 묘소 앞에서 바라 본 사계 묘역이다. 아래 건물이 사계의 사당인 염수재이다. 염수재 바로 뒤에 큰 소나무 아래 산소가 판교공의 손자인 성균관진사공 정수 할아버지 산소다.

 염수재는 4칸집으로 사계선생과 현 종손의 4대 봉사를 위한 건물이다. 좌측 2칸은 마루이고 우측 2칸은 온돌방이다. 제례를 올리는 방은 좌측 2번째 마루방이다.

염수재 본 건물의 북쪽편에 있는 음식을 장만하는 집이다.

 염수재라는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 숭정4년 3월이라고 쓰여있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다. 숭정4년은 서기로 1717년이다.

밤 2시가 지나자 제물준비가 시작되었다. 먼저 제상 위 천정에 앙장(천막)을 치고, 제상 뒤에 병풍을 둘러쳤다. 향안(향을 담는 작은 상)과 신위를 모시는 교의(의자)를 설치하였다. 모래와 띠묵음을 담은 그릇인 모사기를 준배했다. 모사기는 강신 때 모사기에 술을 붓는 것은 신을 부르는 의식이다..  

 병풍은 12폭이다. 이 병풍에 있는 글은 임금이 사계선생에게 내린 교지로 내용은 예학의 종장으로 인간생활의 도덕성 확립에 이바지지 한 공이 커 문묘에 배향하도록 임금이 명을 내렸다는 내용이다.

 참배객은 삼삼 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맨 앞에 보이는 사람은 사계선생의 종손 아들인데 장애아다. 사계선생의 아버지 황강은 천하가 알아주는 천재로 알려졌고, 수 많은 직계후손이 명성은 날린 훌륭한 집안인데 16대 후손 중에 장애자가 나오다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   

왜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중요시 했을 가? 먹고살기 어려울 때는 제물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게지만 제사를 통하여 자손은 조상을 생각하며, 만나 서로 알고 지내며 돈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여 주는 훌륭한 관습으로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서로 사이가 나쁜더라도 제사 때 만나 화해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게 된다. 자주 만나야 정이 들고 가까워지게 된다.      

광산김씨는 다른 양반보다 제물에 더 정성을 쏟는다고 알려졌다. 

제물을 차리는 것을 진설이라고 한다. 진설은 쉽지 않기에 진설자가 있다.

 신위와 가장가까운 곳에 시접과 잔밥을 놓고 메와 갱(국)을 차린다. 맨 앞줄 5렬에는 과일, 4렬에는 포와 나물, 3렬에는 탕, 2렬에는 적과 전, 면, 떡을 놓는다. 맨 앞줄 과일은 10가지가 차렸다. 홍동백서로 순서로 차렸다.

 초헌관이 봉헌하는 육적(소고기), 아헌관이 봉헌하는 어적(생선), 종헌관이 봉헌하는 계적(닭고기)가 준비되어 있다.

 향안(향을 피우는 탁자)에 향로와 향그릇이 있고, 낮은 상에는 술잔과 손잡이가 있는 술주전자가 있다. 향안 아래에 강신때 지신을 부르는 모사기가 있다. 그 옆에 퇴주그릇이 있다.

지방 놓는 상이 있고, 그 앞에 작은 상은 초헌, 아헌, 종헌 때 각각 올리는 육적, 어적, 계적을 올려 놓을 때 사용하는 작은 상이 있다. 맨 놋그릇은 밥(메)와 국수(면)을 담은 그릇이다. 할아버지는 그릇은 크고, 할머지 그릇은 뚜껑이 뽀쪽하며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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