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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연

(재)정조인문예술재단-(사)화성연구회 공동주최 '정조시대의 문화예술' 특강 8강: 정조시대 여항(閭巷)문화

by 仲林堂 김용헌 2024. 7. 4.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이 강의하고 있다.

 

(재)정조인문예술재단과 (사)화성연구회 공동 주최 '정조시대의 문화예술' 특강 8강이  7월 4일 19시부터 21시까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창룡대로 21 수원화성박물관 영상교육실에서 있었다. 이날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이 "정조시대 여항문화: 난정수계를 중심으로"정조시대 여항(閭巷) 문화"란 주제로 강의를 했다.

 

박 강사는 "중국 진나라 영화9년(서기 353년) 황희지를 비롯한 42명의 문사들이 난정(蘭亭) 문가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를 하며 시를 짓는 행위를 난정수계(蘭亭修稧)라 하였다. 그 중 26명은 시를 지었고, 16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 26명이 지은 시는 난정집(蘭亭集)으로 묶여 왕희지가 여기에 서문을 썼다. 난정수계는 삼국시대부터  흘러 들어와 조선시대까지 우리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조는 여러 차례 난정수계 모임을 가졌다. 정조 17년(1793, 계축)에는 원임과 각신의 자제, 승지, 사관을 지낸 사람 39명을 불러 옥류천 굽어도는 곳에서 술과 음식을 내리고 물가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게 했다. 무신년(1788년)에는 29명이 참여하였다. 을묘년(1795년)에는 98명이 참여하였다. 정조 계축년(1793년 늦봄에 43인이 남영수각에 시회를 갖고 계첨(稧帖)을 남겼다. 

 

규장각에는 재능만 있다면 가난한 여항의 지식인이라도 발탁하여 왕도정치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옥계시사(玉溪詩社)가 결성되어 핵심적인 역활을 했다. 옥계시사는  송석원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옥계시사에 입회하려고 했다. 정조는 이들 규장각 서리들에게 여러 특전을 내려 주었다. 정조가 사망한 후 규장각은 없어졌지만 이들 여항인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 문화 발전에 역활을 했다."라고 말했다.

 

이번 8강은 '정조시대의 문화예술' 특강 총 9강 중 8회차 강의였으며, 마지막 강의 9강은 7월 13일 정수자 시인이 사회로 "조선문화예술의 계승과 창신"이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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