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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상식

오덕만 (사)문화살림 대표의 발표: 우현 고유섭 선생의 한국미(韓國美)란?

by 仲林堂 김용헌 2023. 7. 18.

나는 오덕만 한국문화재지킴이연합 회장이 7월 18일 19시부터 화성박물관에서 "문화유산과 문화재지킴이의 가치"란 주제 발표 전에 한국미에 대하여 고유섭 한국최초 미학자의 '한국미'의 특징에 대한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하여 그 내용을 촬영하여 아래에 올립니다. 

오덕만 전국문화재지킴이연합 회장이 화성박물관에서 (사)화성연구회 주최 '화성바로알기' 강좌에서 발표하고 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의 "한국미"의 특징이다.

우현 고유섭이 그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한국미는 위에 사진에 있다. 그 내용을 다시 아래와 같이 풀이한다.

한국인의 미는 첫째 기교가 없는 가운데 기교가 있다. 즉 기교가 부리지 않는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 구수한 큰 맛이 있다는 것이다. 구수하다는 것은 "순박하하고 순후함에서 오는 큰 맛이다."라고 설명한다. 순박이란 있는 그대로 자연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순박이란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는 순수함이고, 순후라는 것은 온손하며 인정이 두텁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기교가 없고 구수한 큰 맛이 있는 우리의 문화가 조선조에 들어오며 단아함이 있는 멋이 더해졌다라고 말한다. 구수함에 단아함 즉 예쁜 것)이 합쳐 고요한 아름다움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예술은 민예적(民藝的)이라고 했다. 민예적이란 '삶에 예술이 들어 있다'라는 것이다. 즉 삶이 예술이고 종교였다. 그렇게 하여 우리 문화는 '질박하고 순박 순후함이 있고, 음악적으로 리듬감이 생동감이 있고 율동미 등이 생겨났다'라고 말한다. 

 

또하나의 한국미의 특증은 비균제성(非均齊性)이 있다. 균제성이 없다라는 것으로 균제(均齊)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가지런함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며 대칭이 아님이라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잡혀 가지런 함이 있으면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비 대칭인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다. 서양의 건물이나 문양은 좌우 또는 상하가 아주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독수리 머리는 하나 이나 독수리 문양은 머리가 둘이다. 둘이라야 대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대칭이면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일상을 깨뜨는데서 찾는 아름다움으로 대칭보다 한 차원이 높은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근래 한류에서 묻어난다고 본다. 한류는 차원이 높은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고 있다. 차원 높은 아름다움은 당장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 속에 묻어서 나온다고 보았다.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의 이념이 들어 있다. 나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널리 이웃과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건국이념이 들어 있는 신화는 없다'라고 말한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운 나라라고 말한다. 유교의 사상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인(仁)이다. 인은 기독교의 사랑이며 불교의 자애와 같은 것이다. 인은 예를 통하여 구현된다고 말했다. 유교는 나라에서 전국에 300여개의 향교를 세워 교육을 하였다. 유학은 가르침은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유교는 하늘로 부터 부여 받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수기치인(修己治人: 자기를 닦아 남에게 이르게 함)을 이르게 함이다. 이와 같이 훌륭한 사상은 우리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뿌리가 내렸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잠시라도 치안이 불안하면 폭동이 일어나 약탈이 자행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약탈은 단 한번도 일어나자 않는다. 우리 국민은 높은 도덕성이 알게 모르게 갖춰 있기 때문이다. 

 

한국미가 조선조에서 단아함으로 더해졌다. 거기에 조선조의 유학 이념은 사람답게 살라는 도덕이 뿌리가 내렸다. 우리 문화는 수준 높은 아름다움이 있고 높은 도덕성까지 가지고 있다.   

한옥의 대가 신영훈 도편수이다. 오덕만 회장은 신영훈 도편수를 5년에 따라 다녔다고 한다.
오덕만 강사가 정리한 한국미에 대한 생각이다.
펄벅 여사가 본 한국인의 성품이다.
한국인의 성품은 '소도 고생했으니 짐을 함께 나눠 지고 간다"에서 펄벅은 다 보았다고 한다.

블로그 '스토리를 찾아서'에서 고유섭에 관한 글은 있어 아래에 인용한다.

최순우는 고유섭과 함께한 10년 동안 탁본을 뜨는 일부터 유적 유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배운다.

고유섭 서재에 있는 고유섭이 지은 책은 물론 고려사,조선사등 관련책을 읽는 일도 꾸준히 이어갔다.

개성에 산재한 300여개의 절터를 답사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답사기를 작성하고 청자 가마터를 찾아 개성일대를 뒤졌다.

고유섭은 개성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은 고려청자이고 청자 가마터가 분명히 개성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청자 가마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즈음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진홍섭과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황수영이 고유섭을 찾아와 제자가 된다.

진홍섭은 나중에 개성박물관 관장,경주박물관 관장,이화여대 박물관 관장,이화여대 교수를 지냈다.

황수영은 진홍섭과 동갑으로 동국대 교수 국립중앙박물관 관장,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이들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 3인은 개성이 고향으로 개성 3걸이라고 불리웠다.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로 평가받는 고유섭은 1944년 급성간경화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약 150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고 유적조사, 답사기, 연구여담, 화가론, 시평, 해설, 수필 등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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