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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

융릉 기신제 봉행 관람

by 仲林堂 김용헌 2023. 7. 12.

융릉 가는 길이다. 평화로우며 쾌적하다.
시야가 멀리까지 가는 숲이다.
원형의 곤신지이다.

오늘은 융릉에 묻힌 사도세자가 죽은지 261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처음에 지금의 동대문 인근인 옛 양주 배봉산 영우원에 묻혔다. 정조는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영우원을 흉지로 생각하고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위치한 화산(花山)으로 천장하였고, 그 이름을 현륭원이라고 했고, 고종 때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능호도 융릉이라고 격상하여 추존했다. 

 

융릉을 세울 당시 이곳을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반룡롱주: 盤龍弄珠)의 최고의 길지의 명당으로 생각했다. 이곳은 윤선도가 효종의 능침으로 지목하는 등 풍수가들이 주목하던 곳이었다. 

 

정조는 융릉 조성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정우태를 초빙해 원제(園制)에 유래가 없는 국왕의 격에 걸맞은 치장을 명했다. 능침, 혼유석, 망주석이 있고, 문무인석, 석마 등이 있다. 

 

융릉 기신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례하기로 약속하여 오늘 10시에 융건릉 매표소 앞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제례를 주관한 전주이씨종약원 융건릉봉향회에 등록하니, 참가자라는 명패천을 꽂아 주고 타올과 안내책자를 준다. 우리는 제례봉향회 일행보다 앞서 융릉으로 걸었다. 길가에 있는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가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풍경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새롭게 다가 온다. 융건릉은 잘 가꾼 숲으로 유명한 산책길로 소문이 나 있다. 우리 일행도 맘 탁 놓고 평안하게 걸었다. 

 

융건릉 원대황교를 지나 융건릉에서 명당 중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여주가 되는 자리라고 하는  곤진지를 찾았다. 곤신지는 우리나라의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네모나 있으나 이곳 연못은 여의주(如意珠)를 표시하는 곳으로 둥근모양이다. 지금은 믿거나 말거나 무시하곤 하지만 그 때는 풍수를 많이 믿었던 것으로 본다.

 

우리는 봉양회 헌관과 집사 일행 보다 앞서 도착하여 정자각에 있는 제물을 살펴보았다. 사진 촬영을 하려고 하니, 주최 일행 중 한 사람이 '찍지 말라'라고 큰 소리친다. 사진 촬영하여 신문기사로 나오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들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라! 행세를 부리니, 군말 없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한 사람이 릉의 석물을 연신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허락 받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어떤 권한이 있을 까? 세상일도 이와 같이 허락 받은 사람이 좌지우지하며 알짜배기를 챙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변죽에서 시키는대로 할 뿐이고 겉만 핣을 뿐이다. 

 

융릉 비각으로 가서 묘비를 촬영했다. 두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정조가 세운 사도세자의 비이고, 다른 하나는 고종 때 왕에서 황제로 고종이 되면서 그의 4대조인 사도세자 장조를 의황제로 추존하고 의황제로 격상하여 세운 비이다.

 

제례봉행을 시작하는 11시가 되자 황색 초롱을 든 집사가 앞장 서고 그 뒤에 삼헌관과 제집사, 일반 참반원이 따라 홍살문 지나 들어 온다. 신도 중앙에 있는 황색보가 깔린 탁자 앞에서 멈추고 나서 초헌관은 향과 축이 있는 함을 축관에 건네고, 축관은 그 함을 받아 신도로, 헌관은 그 옆길을 걷고, 일반 참사자는 잔디가 있는 길을 걸어 올라갔다.   

 

집례의 창홀이 은은하게 들리는 가운데 제관과 집사는 집례자의 창홀에 따라 초헌, 아헌, 종헌을 했고, 마지막으로 축문을 태우는 망료례를 마쳤다. 제례의식을 가까이서 보고 그 봉행 절차를 자세히 알리면 좋으련만 허락받지 못하여 먼 발치에서 보았을 뿐이니 전할 수도 없다. 제례가 어떻게 봉해되나 알 수 있는 사람은 알자와 찬자 뿐이고, 일반 참사자들은 정자각 아래에서 집례의 창홀만 듣고 상상할 뿐이다.

 

제례봉행 후 우리 일행은 정조가 처음 묻혔던 초장지(初葬地)를 찾았다. 이곳은 융릉에서 걸어서 5분정도가 되는 곳이었고, 차가 다니는 도로 옆에 있었다. 정조임금을 무덤을 세웠을 때는 릉 다웠겠지만 지금은 한갓 일반인의 묘 정도로 보였다. 

 

왕의 제사 기신제는 전주이씨종약원에 의하여 집례의 홀기 창홀에 따라 변함없이 해마다 진행되고 있다. 왕에 대한 제례 봉행은 큰 행사로 변함 없이 전통을 이어 갈 것으로 보이나, 한편으로 제례의 홀기를 듣고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가? 걱정 또한 없지 않다.

 

돌아갈 때 융건릉 입구에서 융건릉종약원 총무를 만나 축문이 잘 못된 곳을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내용을 검토해 볼 가? 모르겠지만 오늘 제향에 참석하여 작은 역할을 했다는 보람이다. 그 총무가 식권을 줘 제례참례자와 같이 칼국수집에서 참배객이 몰려 혼잡한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가 있는 준소이다. 초헌, 아헌, 종헌이 올릴 청주가 있는 술통 산뢰(山罍)이다. 준소 탁자가 멋이 들어 있다.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릉원"이라고 정조가 세운 묘비이다.
"대한 장조황제융릉 헌경황후부좌"라고 쓴 고종이 세운 묘비이다.
비석에 총상의 흔적이 여러 곳에 있다. 6.25 전쟁 때 이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멀리서 렌즈를 당겨 촬영한 융릉 석물이다.
팔각장명등은 새로운 양식이라고 한다.
멀리 천막 아리에서 제례에 참례하고 있는 참반원이다.
제례가 봉행되고 있는 융건릉 전경이다.
정자각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정조가 처음 묻힌 초장지(初葬地)이다. 이곳은 융릉에서 800미터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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