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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우장춘 박사에 대한 재평가와 그의 묘 탐방

by 仲林堂 김용헌 2022. 9. 29.

 

여기산 중턱에 있는 우장춘 박사 묘다. 봉분이 없이 상석 위에 그의 흉상이 새긴 동판이 있는 자연석을 세웠다.

 

우장춘 박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위키백과(우장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에서 자세히 나와 있다. 내가 본 우장춘 박사에 대한 한국농업에 끼친 영향은 과대평가된 게 아닌가 싶다.

 

8.15해방이 된 후 언론은 망명정객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 박사가 대단한 인물로 평가했다. 그가 우리나라로 귀국하면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구해낼 인물로 보았다. 그는 씨없는 수박을 발명한 인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일본동경대학 박사라고 하지만 정식 학위과정을 거치지 않고 논문만 제출하여 박사가 된 페이퍼 박사였다. 일본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학위자라고 높게 평가했다. 페이퍼박사는 학위과정을 통과한 학위취득자에 비하여 수준이 낮다.

 

부산을 중심으로 1947년 우장춘 박사 귀국 운동이 벌어졌다. 우리정부에는 당시 한국에 오는 이적비로 100만엔을 줬다. 지금으로 돈 가치로 보면 10억원정도가 되는 금액이다. 그는 1950년 귀국선으로 타고 한국으로 와서 미리 자리를 마련해 둔 부산원예시험장에 근무를 했다. 일본인인 그의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겠다는 요청을 우리정부는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 가면 다시 한국에 돌아 오지 않을 가 의심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우리 농업을 살려 가난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업적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에 비하여 그의 연구성과는 그렇게 높지 않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그의 연구성과로 강원도 감자를 개량했나고 하나 그 실체는 알 수 없고,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하여 한국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 제주도 환경 감귤재배, 폐튜니아를 화초로 개발  등이 있으나 그 성과가 확실치 않고 두리뭉실하게 포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59년 8월 10일, 향년 62세의 나이로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있다.

 

그의 묘소는 그간 개방이 되어 누구나 찾아 볼 수 있었으나 농촌진흥청이 2014년 전주로 이전하고 나서 여기산이 백로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여기산 둘레에 울타리가 처 있어 수원시 공원관리과로부터 허락 없이는 출입할 수 없다. 

 

지난 7월 24일 (사)화성연구회의 "수원의 역사, 수원의 문화재" 문화재청 사업 수행 차 수원시로부터 허가를 득하여 우장춘 박사 묘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허가 없이 일반인이 찾을 수 없지만 관리는 잘 되고 있는 편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근무하며 자주 보았던 2014년 이전 모습과 변한 것은 농진청에서 세운 게시판 하나뿐이었고 다른 것은 옛 모습 그대로 였다.  

 

멀리서 본 우장춘 박사 묘역이다.
농촌진흥청에서 세운 그의 이력과 업적이 있는 간판이다.
누군가가 꽃병을 놓았다.

 

일행이 우박사 묘역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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