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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킴(지정 미지정)

벌말도당굿 및 도당(都堂)

by 仲林堂 김용헌 2022. 5. 15.

전면에서 본 벌말도당이다.
벌말 도당이다. 1칸 맛배지붕이다. 벽은 돌과 시멘트로 쌓았다.
도당 옆에 고목 한 그루가 있다.
안내 게시판이다. 선경직물의 창업주의 부친인 최학배씨가 주민들과 협조해서 기와지붕의 석조건물로 개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벌은 넓고 평평하다는 뜻이다. 벌말은 평야지에 있는 마을을 가리킨다. 한자로는 평동(平洞)이 된다. 우리말로는 벌말도당굿이 되고 한자로는 평동도당굿이 된다. 벌말은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마을로 일년이 편안하고 농사가 잘 되도록 기원하는 도당굿이었으나 마을이 되시화가 되고 인근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풍농보다는 대동의 발전을 기원하는 굿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당굿에 관하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벌말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여자들이 굿 준비에 더 적극적이었는데, 남자들이 굿에 참석했을 때에도 비용 추렴은 여자들의 몫이었다고 하며, 남자들로 이루어진 두레패가 사라지자 여성들이 풍물을 배워서 돌돌이를 돌았다고 한다. 이는 여자들이 매년 당굿에 참여하면서 저간 사정을 남자들보다 훨씬 잘 알게 되어 역할 비중이 커진 듯하다.

또 다른 이유는 인근에 공장이 생기면서 남자들이 직장 생활을 하게 되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성들이 굿 준비를 맡게 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당주무가 인근 세류동에 사는 여성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류동과 평동은 거리상으로도 가까웠고, 당주무인 버드내 마나님은 평동과 고색동에 많은 단골을 거느리고 있던 큰무당이었다고 한다. 무당집으로 무꾸리(무당이나 점쟁이에게 점을 치는 일)나 치성을 다니는 것은 부녀자들의 몫이므로 이 과정에서 같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당굿에 관한 논의를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벌말도당굿을 지켜온 사람들은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굿 비용을 마을에서 준비하지 못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도당굿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줄어들어 주민들이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반면, 굿 연구자나 보존회 회원들이 굿판을 유지해 가고 있다."

 

도당에 관하여 위키백과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당은 원래 초가로 되어 있었고 나무 비석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선경직물의 사장이었던 최학배씨가 동네 주민들과 협조해서 기와와 석조 건물로 개축했다. 도당 안에는 말을 탄 신라 경순왕인 김부대왕과 안씨부인을 그린 탱화가 벽면에 걸려 있다. 벌말 도당굿은 음력 정월 11일에 마을에 있는 도당에서 당주 굿을 한 후 서낭모시기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돌돌이 후 당 안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도당굿이 펼쳐진다. 200년 이상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운 농사를 기원하는 대동굿으로 전승되었다."

 

오늘 오후 서호공원을 지나 수원천변 삼남길을 따라 수원시 권선구 평동로 76번길 23-7 벌말도당굿 및 도당을 찾았다. 바로 평동복지회관 옆이나 이 부근이 중고차판매시장이라 주차한 차량이 많아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도당은 철조망으로 울타리가 쳐저 있어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었고, 철조망 밖에서 촬영을 했다. 도당 안에는 말을 탄 신라 경순왕과 안씨부인의 탱화가 있다고 하나 볼 수 없었다. 

 

한 주민을 만나 도당굿에 관하여 여쭈니 "그간 수원시 예산 지원으로 매년 개최했으나 근래는 예산 지원이 없어지면서 굿 행사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철조망 울타리 사이로 휴대폰 카메라를 넣어 겨우 촬영한 도당 전면이다.
고목 앞에 천지라고 쓴 상석이 있다. 이 상석에 제물을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 병인년은 1986년이다.
고목의 끈으로 상중하단에 묶고 명태 2마를 끼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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