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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3.1절에 "제암리 학살사건" 발생지 방문

by 仲林堂 김용헌 2022. 3. 1.

오늘 일행과 제암리 마을을 찾아 갔다. 마을 입구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길가에 수백대의 승용차들이 들어서 있다. 겨우 주차를 하고 교회와 순국기념관을 살펴보았다. 마을 앞 마당에서 하나의 공연으로 우리나라 어린이와 일본순사가 팀이 되어 줄다리기 시합이 있어 관람했다. 줄다리기 시합에 앞서 사물놀이팀의 신나는 풍물놀이가 있었다. 그 당시는 엄청난 비극이었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나 원한을 풀 수는 없지만 이제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고,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 입장하려는 젊은이들이 줄을 서 있다.
순국한 분들의 묘소에 분향하고 나오는 젊은이들이다.

 

순국한 사람들은 장례도 못치르고 스코필드 박사에 의해 1919년 4월 17일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국사편찬위원장 이현종 선생이 짓고 김응현 선생이 쓴 비문이다. 

 

학살당한 분들의 이름이다.

 

일본순사가 한팀이되어 우리나라 어린이들과 줄다리기 시합을 하고 있다. 

 

우리 어린이팀이 일본 순사팀에게 이겼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 일제에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살던 1919년 4월 15일 일제에 의해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일제에 항거한 주민을 제암교회에 모아 놓고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후 불을 질러 주민 29명을 죽인 사건이다.  다음 백과에서 아래와 같이 이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발생 배경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에 모인 민간인을 일본 군인들이 학살한 사건. 1905년 8월 5일 건립된 제암리교회(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는 H. G. 아펜젤러의 전도를 받은 안종후가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초였다. 그후 교인들의 증가로 1911년 교회 건물이 마련되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던 당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장날이었던 3월 31일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장터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주민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자 이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위협 사격 끝에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주모자를 체포했다.

격분한 시위 군중은 일본인 가옥과 학교를 파손하고, 이튿날부터 밤마다 산에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했다. 4월 3일에는 수촌리 주민들이 주동이 되어 우정면과 장안면 면사무소를 부수고 주재소를 불태웠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경찰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 민가에 불을 질러 주민들을 학살했다. 후에 이 사건은 '수촌리 학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경과

만세시위가 있은지 10일 후인 4월 15일 일본 보병 79연대 소속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이 제암리와 고주리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제암리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그들은 4·5만세 시위 당시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행한 만행에 대해 사과할 것처럼 유인하여 주민들을 교회 안에 모이도록 한 후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잠그고 짚더미를 던지고 석유을 끼얹은 후에 불을 질렀다.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남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2명의 목을 베었고 제암리 마을 32가구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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