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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향교

양주향교에 있는 조정구 선생 공적비

by 仲林堂 김용헌 2022. 2. 17.

광무7년(`1903년) 2월에 세운 조정구 선생의 공적비이다.
구글검색을 통해 찾은 조정구 선생의 사진이다. 

 

이종찬의 부모이다. 아버지는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이고, 어머니는 조정구 선생의 딸 조계진이다.
순조가 비서실장인 조정구 선생에 유조(지금의 유언)을 한 신한민보 기사이다.
조정구 선생이 양주군수로 있으면서 경리원역둔토성책자에 인장과 서명이 있는 책자이다.

지난 2월 16일 일행과 함께 경기도 양주시 부흥로 1423번길 50 양주향교를 찾았다. 향교 앞에 안내 게시판 바로 옆에 공적비가 있었다. 조정구(趙鼎九: 1862-1926) 선생의 공적비다. 비문의 제목도 일반 공적비나 선정비와 달리 모성어도지비(慕聖衙道之碑)다. 이름 앞에는 행군수(行郡守)라고 되어 있고, 광무7년(1903년) 2월이라고 써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종2품의 예조참의까지 올르셨는데, 4 단계나 품계가 낮은 종4품의 군수를 맡으셨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품계보다 낮은 벼슬을 할 때는 직위 앞에 행(行)자를 붙였다. 이 비문으로 보면 그가 군수를 했다는 게 틀리지 않다. 조정구 선생이 인장과 서명이 있는 책자가 위 사진에 보이는 책자에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양주군수를 역임했음은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양주관아에 양주목사송덕비군 중에 유일하게 목사가 아닌  군수 송덕비가 하나 있다. 바로 1904년에 세운 홍태윤불망비(洪泰潤不忘碑)이다. 양주가 주(州) 단위의 큰 고을이었으나 군(郡) 단위의 작은 고을로 축소 되어 홍태윤이 양주의 군수(郡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조정구 선생은 양주향교지에 양구군수로 1899년 1월 12일 부임했다는 기록이 양주향교지에 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왜 이 비문이 양주향교 앞에 있을까?이다. 그가 양주에 머무르면서 양주향교에 공헌한 바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드나 이에 관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조정구(趙鼎九) 선생에 관하여 검색을 하니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다음과 같다.

 

1880(고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승지·부제학·대사성·이조참의·규장각직제학·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896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뒤 궁내부협판·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 등 주로 궁내부의 요직을 지내며 왕실의 의례를 담당하였다.

 

그밖에 평식원총재(平式院總裁의정부찬정·판돈녕부사·기로소비서장(耆老所秘書長) 등도 역임하였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 때 전 의정부찬정이라는 명의로 일본정부가 주는 은사금(恩賜金) 및 남작의 칭호를 거절하고 합방조서(合邦詔書)와 고유문(告諭文)을 찢었다. 병합에 항의하여 두 차례나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가족들이 구원하여 실패에 그쳤다.

 

그 뒤 양주 사릉리(思陵里)에서 미망인이라 자처하고 은둔하였다. 1917년 스스로 월파거사라 칭하며 금강산 반야암(般若菴)에 은거 중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상경하여 인산(因山)을 치르고 중국 허난성[河南省]으로 망명하였다. 7년 동안의 유랑 도중 둘째 아들 조남익(趙南益)의 사망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봉선사(奉先寺)에서 기거하다가 사망하였다.

 

1903 7 3일 조정구의 군수 시절 덕행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가 세워졌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으나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266번지 양주향교 앞으로 옮겨져 있다. 조정구의 공덕비는 1958년에 복원한 것으로 앞면에 행군수조정구모성아도지비(行郡守趙鼎九慕聖衙道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의 제목에 있는 "모성아도지비(慕聖衙道之碑)"를 풀이하면 "성인을 숭모하고, 관아의 도를 지키신 비"라고 짐작해 본다.

 

조정구 선생은 순조임금의 지금의 비서실장과 같은 기노소비서장을 밭았고, 순조가 붕어하면서 유언을 1926년 4월 26일조정구 선생에 했다고 신한일보 신문 기사가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사위이며, 조봉하 판서의 손자가 된다. 3형제를 두었으며, 큰 아들 조남승(1892-1933)은 비서승이었고, 둘째 아들 조남익(1885-1924)는 대종이었다. 딸은 조계진이다. 딸 조계진은 이회영 선생의 큰 아들 이규학과 결혼하였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전 국정원장을 한 이종찬이다. 

양주향교지 1128쪽에 있는 양주의 마지막 부사로 광무3년(1899년) 1월 12일 부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양주는 주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군수로 부인한 것이다.

 

양주향교지에 있는 조정구 선생에 관한 기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내용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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