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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향교/수원향교 안내

옛 수원읍치에서 이건(移建)한 명륜당(明倫堂)

by 仲林堂 김용헌 2021. 10. 24.

. 옛 수원읍치에서 이건(移建)한 명륜당(明倫堂)

 

명륜당(明倫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이다. 수원향교 명륜당은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기 전 구읍치 도고산 아래에 있던 오래된 건물이다. 이경원(李慶遠)명륜당 중수기에 의하면 1660년 수원부의 서쪽에서 도고산 아래로 향교를 이건하였을 때 명륜당의 기초공사가 견고하지 못하여 점차 축대가 무너지고 지붕과 기둥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1725(영조1) 수원부사로 부임한 김려가 자신의 녹봉과 쌀 10말을 희사하여 공사비를 마련하였으나 곧 벼슬이 갈림에 따라 공사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 뒤 후임으로 부임한 부사 조정만이 유대재 등 향교 유생들과 뜻을 모으고 돈 수백 꾸러미와 쌀 10 여 섬을 마련하여 1726(영조2) 9월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 해 4월 낙성식과 향음주례(鄕飮酒禮)하였다.

 

부사 김려와 부사 조정만이 중건한 건물을 1790년 신 읍치(지금의 팔달산 남쪽 아래)로 이건했다. 신읍치로 이건한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한 차례 정조의 어명에 의해 중수되었으나 구읍치에서 중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륜당은 그때 중수하지 않았다.

 

수원향교에서는 선생님은 어떤 분이며 얼마나 많은 학생이 어떻게 공부했는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1727년 이정원이 쓴 명륜당중수기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중수기에따르면 중앙에서 파견하는 교수는 철폐되었고 수령(수원부사)가 교수의 임무는 겸하였으나 문서행정이나 소송 등 업무에만 주력하고 교육은 시행하지 않으니 향교는 다투고 싸우는 장소가 되어 개탄스럽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원부사 조정만은 명륜당을 중건하고 교육을 급선무로 삼았다고 했다. 당시 유생으로는 윤대재, 윤재, 정대기, 이중찬, 민사익, 윤대중이있었다.

 

송덕상(宋德相)수원부향교시강절목서(水原府鄕校試講節目序)”라는 글에서 보면 수원향교강학은 1754, 1765, 1780년 무렵 세 차례에 걸쳐 부활하였으나 재개된 강학도 몇 년이 지난 뒤 흐지부지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수원향교 강임(講任)을 맡았던 유생 김희설(金希說)이 향교 교육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를 강구하던 차 송덕상을 찾아가 향교교육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고, 송덕상은 그 때 강학절목을 작성하여 줬다.

 

수원향교유생은 17911월 정조는 현륭원 원행을 마치고 행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원향교를 방문하여 알성 전배하고, ‘유생은 몇 명이나 되냐고 묻자, 20명이 된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17276명이었던 유생이 20명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정면에서 본 명륜당
명륜당, 동재, 서재
측면에서 본 명륜당
명륜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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