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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향교

공주향교 방문

by 仲林堂 김용헌 2019. 12. 19.

수원향교에서 논어집주를 함께 수학 동문 4명과 함께 12월 17일 9시반에 찾았다.  우리 일행이 공주향교에 도착하자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한 정필웅 선생께서 반갑게 맞아 주신다. 외삼문 앞에 오강표 순절지라는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옆 한쪽에 향교안내표지판이 따로 있었다.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자 5칸 명륜당이 위엄있는 모습으로 다가 왔다. 명륜당 건물은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위엄이 있었다. 기념사진을 여러사람이 찍을 수 있도록 돌 계단 옆에 나무 계단을 붙인게 특별했다. 


근래 향교는 옛 명성은 온데 간데 없으며, 찾는 이도 없으니 문은 닫혀 있고, 또 문이 닫혀 있으니 찾는 이도 없다. 공주는 조선시대 충청도관찰사가 있는 충청 제일의 고을이었을 것이며 향교 또한 충청 제일의 향교였을 것이다. 그 때는 수 많은 유림이 공주향교에 입교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선택된 유생이 이곳에서  뭇 백성의 부러움을 사면서 공부를 했을 터이다. 


평소에는 이 향교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을 텐데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특별히 문을 열어 준 것이다. 


외삼문을 지나니 널직한 마당이 있고 그 뒤에 명륜당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건물을 위엄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니 사람의 흔적이 꽤 오래된 듯하다. 전기 스위치를 올렸지만 평소에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불이 켜지지 않는다. 


명륜당을 나와 대성전으로 들어가니 대성전은 3칸으로 명륜당 5칸에 비하여 작다. 우리나라 18현은 동무와 서무에 있고, 대성전에는 5성위와 공문 10철을 모셨다니 대성전에 모신 사람은 모두 중국사람이고 우리나라 사람은 허술한 동무와 서무에 모셨으니 아직도 이곳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있지 않은 가?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아직도 생각은 조선시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인가?  씁쓸한 마음이다.    


향교 입구다. 홍살문이 앞에 있고 그 뒤에 외삼문이다. 외삼문은 평소에 닫혀 있어 향교측에 사전 방문허락이 없이는 출입이 어렵다. 다른 향교도 공주향교와 마찬가지로 평소에 향교를 닫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열린 세상에 향교는 사회와 단절된 대표적인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향교 앞에 있는 오강표 독립지사의 순절 간판이다. 일제는 "왜 훌륭한 선현이 계신 곳에 목매 자살을 하느냐고 편하 했다."고 한다.

 

공주향교 표지판이다. 역사가 깊으며 규모가 큰 향교다.


문이 3개며 향교 밖에 있다고 하여 외삼문이라고 한다.


명륜당이다. 5칸 큰 건물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이다. 명륜당은 크나 이에 비하여 동재는 아주 작다. 부엌이 있다.  

동재 뒷편에 있는 논어 등 경서를 보관하는 존경각이다.


측면에서 본 명륜당이다.


명륜당 안에 걸린 현판이다. 전기 스위치를 올렸으나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상태에서 촬영을 하여 셔터속도가 느려 사진이 흐리다.


환하였으면 내용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대성전이다. 명륜당은 5칸이지만 대성전은 규모가 작은 3칸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18현은 모시지 못했고, 5성위와 공문10철을 모셨다.




백병풍을 신위전 뒤에 세웠다.


병풍의 내용은 중용30장이다.


앞쪽은 5성위이고, 뒷쪽은 공문10철이다.



향교 뒷편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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