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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판교공파

판교공 세일사 중 가장 오래된 기록

by 仲林堂 김용헌 2019. 11. 24.

광산김씨판교공파종중은 설립은 1981년 8월 15일로 역사가 짧은 편이다. 그 전에는 다른 종중도 마찬가지로 종중 이름으로 부동산 등기를 할 수 없어 후손 몇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법원의 판결이 있은 후부터 종중 이름으로 재산관리가 되었고, 그 후 종사를 맡은 임원들이 사심 없이 종재를 잘 관리하여 지금에 이르러 재산이 있고 종중이 활발하게 움직이니 근래에는 종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70년대 80년대 종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 판교공 종중도 70년대까지만 해도 위토에서 나오는 적은 임차료를 받아 근근히 제수를 차릴 수 있었다. 그 때는 종중 살림이 아주 어려워 세일사 등 종사에 참여하면 제수비를 내야 했던 시절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에 종사에 어떤 분이 참여했나 살펴 보는 것도 또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판교공 세일사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75년이다. 그 이전에도 세일사를 빠짐 없이 모셨을 것이나 종중에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그 때 참석하신 분은 거의 돌아가시고 살아 계신 분이 거의 없다. 그 후손 중에는 종사에 참여하는 분이 많은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간 판교공 종사를 2008년부터 금년까지 맡고, 퇴임하고나서 인수인계를 준비하면서 옛 우리 종사 기록을 살펴보니 70년대부터 90년 때까지 대부분 기록이 없다. 70년대 기록이 두개 남아 있는데 이것도 사장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기에 올려 잊지 못하는 기록으로 남기려 한다.


이 노트에 1975년 세일사 도기(到記)가 있다. 도기란 도착한 사람의 명단 즉 세일사에 참례한 명단이다. 원래는 노트에 이름도 없었으나 내가 이름썼다.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을묘(乙卯)년은 1975년이다. 守鉉님은 우리 종중 창립할 때 부회장 선임된 분으로 현재 우리 종중의 상무이사로 있는 영언씨의 아버지며, 영문 부회장의 큰아버지이다. 哲鉉님은 수현님과 같은 연기군 소정면 고등리에 사시는 분으로 1981년 세일사에도 참석하셨으며 우리 종중의 고문으로 계셨던 분이다.


영목(永穆)님은 같은 고등리 마을 출신이며 전의 일가 5대 종손이며 관수 대의원의 아버지이다. 영갑(永甲)님은 그 부친이 1917년 판교공파 족보 발간 시 발행자였고, 그 아들은 국회사무처 감사관을 역임했다. 영일(永日)님은 우리 종중이 창립 후 10여년간 상무이사로 우리 종중을 이끌으시었던 분이다. 영원(永源)님은 그 조부가 1917년 판교공파 족보를 편찬할 때 상유사였다.


창수(昌洙)님은 그 아버지가 1917년 우리종중 족보편찬할 때 교정을 맡았고, 그 아들이 지금 영모재종중 도유사 용성님이다. 한수(漢洙)님은 종손이며 우리종중 창립총회 때 회장었고 그 후 1991년 용선 회장 취임할 때까지 회장으로 있었다. 이 날 한수님이 초헌관을 맡았다.


아헌관을 맡았던 창수(彰洙)님은 홍천에 사시며 그 아들이 우리 종중의 이사를 맡고 있는 용기씨다. 흥수님은 같이 홍천에 살며 창수님과 6촌간이다. 안성의 을수(乙洙)님은 우리 종중의 전 부회장 범수(範洙)님의 둘째 형이다.


종헌을 맡은 용길(容吉)님은 화성 상두리 출신으로 우리 종중 상무이사인 윤중님과 7촌간이다. 축을 맡았던 용오(容五)님은 현재 우리 종중의 회장이다. 용권(容權)님은 영암군 도포면 영호리 출신으로 경기도 안산에 살며 1958년 족보 편찬 때 교정을 맡았다.


1975년 10월 15일 강원도 홍천 창수 도기 금10만원정, 강원도 홍천 흥수 도기 금 5천원 정, 우 금액은 별청 유사 보관(?). 등기 일체를 용식에게 보관함. 


강원도 홍천 출신 창수님께서는 10만원, 흥수님은 5천원을 세일사에 헌성금(제수비?)로 내 놓아 이 돈을 별청유사인 용식님이 잘 관리하라는 기록이다. 당시 10만원을 헌성금은 큰 돈이라고 할 수 있다. 시골에서 10만원을 중중에 내 놓을 수 있는 분이라면 대단히 종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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