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간성향교 탐방

by 仲林堂 김용헌 2019. 10. 17.

수원향교 논어동아리 4인방은 10월 14일 늦은 오후 강원도 고성군 간성향교 (전교 박유조)를 간간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찾았다.


일행은 원주향교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홍천을 지나 인제를 거쳐 용대리를 통과하여 진부령을 넘어 고성읍내 전방 3km에 위치한 간성향교에 도착했다. 진부령을 넘을 때까지만 해도 맑던 날씨가 고개를 넘자 흐리더니 약하게 비가 내렸다.


간성향교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향교로 수원에서 그곳까지는 가기 싶지 않다. 내가 이곳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수원향교 15명과 함께 간성향교 8명이 공자와 맹자의 고향 곡부와 추성을 다녀오면서 서로 잘 알게 되어 이번에 방문을 했다. 간성향교의 방문은 부득이 폐를 끼칠 수 있지만 그런 가운데 새로운 관계를 쌓을 수 있는 것이기에 나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중국방문을 추진했던 간성향교의 원임전교이신 윤금열 선생께 연락을 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동협문을 보니 문이 열려 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여 들어 가려고 하자 인기척을 듣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고성향교 박유조 전교님과 황광율 사무국장께서 반갑게 맞아 주신다. 행랑까지 붙어 있는 내삼문이며 대성문이 규모가 엄청 크다. 명륜당으로 내려 가니 망루와 같이 2층으로 된 명륜당이 4칸으로 수원향교 명륜당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동무와 서무는 작지만 아담하게 잘 지은 집이다.


건물도 크고 훌륭하며 깔금하지만 경내가 아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풀 한포기 없이 깨끗했다. 이런 오지에 있는 향교라고 하지만 관리는 참 잘되고 있었다. 또한 장의도 수원향교 못지 않게 많았다.


[간성 탐사]

임진왜란에 소실됐고, 다시 6.25에 짓밟혔고

고을 이름까지 고성에 내줬는데도

다시 위풍당당하게 일어선 간성향교


창건 당시 공부자 위패 600년

난리 속에서도 한 시도 흐트러짐이 없이 신주(神主)를 꽉 쥐고 있으니

유교 도통(道統)은 끊임없다.  


한치 한 순간까지도

건물도 마당 조차도 경(敬)하며 

풀 조차 납작 업드렸다.


날은 저물어가고 비는 오는 굳은 날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지금은 널직한 묘정에는 바람만 스치지만

어느 날 명륜당 글 읽는 소리 끊기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그날까지 신독(愼獨)하고 있다. 


5칸 대성전이다. 원주향교는 중설(中設)이라고 하지만 3칸 대성전인데 이곳은 소설(小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설과 같은 5칸이다. 이 건물을 1956년 중건했다. 그 당시 간성향교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음 알 수 있다. 

 

간성향교 안내 간판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안내 간판 못지않게 훌륭하다. 수원향교도 이와 같이 간판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사무국장께서 동협문으로 나오고 있다. 흙과 돌로 쌓은 담도 보기 좋다.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대성문이다.


누가과 같이 세운 명륜당 훌륭하다. 이 건물은 1960년에 중건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전에 간성향교의 위상은 위풍당당했었음을 건물은 이야기 하고 있다.

내삼문에 현판까지 "대성문"이라고 걸은 향교는 찾기 어려울 듯하다.


촛대가 훌륭하다. 위패를 개독하지 않은 상태다.


위패는 창건당시의 것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사무국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대성전에서 바라본 대성문 후면이다. 풀 한포기 없이 잘 관리했다.


널직한 월대이다.


서무이다.


동무이다.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는 감(坎, 구덩이)이라야 하나 너무 위로 돌출되어 있다.


대성전 뒤편에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측면에서 본 대성전이다.


대성문 뒤에서 바라본 대성전이다.

대성문 앞에서 바라본 명륜당이다.


명륜당 앞에서 바라 본 묘정(廟庭)이다.


우리 일행이 간성향교 박유조 전교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명륜당 앞 묘정 서쪽에서 본 모습이다.

공부자묘정비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