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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여행/중국(태안, 곡부, 칭따오)

공묘(孔廟) 만인궁장에서 규문각까지 답사

by 仲林堂 김용헌 2019. 6. 2.

 

공묘(孔廟)는 중국 산둥성 취푸시 중심부에 위치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중국 최대의 공자묘(廟)이다. 노나라 애공(哀公)은 공자의 사후 2년이 되던 해에 공자의 집을 묘()로 삼았다. 기원 전 205년 전한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은 노나라 공묘에서 제물을 올리고 제례를 지냈다. 그는 후의 황제나 고관들에게도 전례를 따르도록 하였다. 황제는 즉위 뒤나 전승 등 중요한 때 이곳을 방문했다. 그 후 12명의 황제가 공자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직접 방문하였으며, 그 외 100명 이상의 황제가 제례를 위해 대리인을 파견한 것이 196회 이상이다.

 

, , , 원을 지나며 규모가 커졌고, 명청조에 기본 모양이 만들어졌다. 원래 공자의 집은 수나라 611(대업 7) 묘소를 재건할 때 철거되었다. 송나라 때인 1012, 1094(소성 원년)3개의 전각과 4개의 정원을 재건하고, 그 주위에 총 400개가 넘는 방을 지어 많은 궁전을 건축했다. 금나라 말기인 1214(정우 2)에는 화재와 약탈로 공묘는 파괴되었다. 그 후 원나라 초기인 1302(대덕 6)에 재건했고, 1331(지순 2)에는 궁전과 같이 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1499(홍치 12)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그 후 현재의 규모로 재건되었고, 그 후 건물이나 비석과 장식 등이 추가되어 현재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남북을 중심축으로 배치했고, 부속건물은 좌우대칭으로 배치했다. 면적은 140,000이고, 남북 길이는 1,120m이다. 5殿, 1(팔작집), 1, 2(행랑), 2(남향 대청이 있는 집), 兩齋宿(재개할 때 묵는 집), 17碑亭(비석 정자), 54座門, 466이다.

 

 

공묘는 그림의 좌측에 있고, 우측 상단은 공부이고, 좌측하단은 공묘공림에서 북쪽으로 약2km 지점에 있다. 

 

우리 일행은 5월 29일 오전 11시부터 만인궁장(萬

仞宮牆

)에서 출발하여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 영성문(欞星門),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지성방(지성방(至聖坊), 성시문(聖時門),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문문(同文門), 규문각(奎文閣), 13비정(十三碑亭), 대성문(大成門), 향단(香壇), 대성전(大成殿), 침전(寢殿), 성적전(聖蹟殿) 순으로 방문했다.

 

공묘의 주 건물인 대성전 앞에 여러 건물이 많은 것은 후대에 황제들이 공자를 존숭하여 연이어 건설 해 놓았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향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만인궁장(萬

仞宮牆

) 앞에 도착했다. 만인궁장 중 궁장은 궁궐의 담이다. 성문의 앞에 돌출되어 나와 있는 옹성이다. 왜 만인이라고 했을 가? 바로 알 수 없었다. 

 

검색해 보니 『論語』자장편에서 취했다. 노나라 대부 숙손무속(叔孫武叔)이 "자공이 중니보다 어질다(子貢賢於仲尼)"고 하자 자공이 " 내 집의 담은 어깨 높이쯤 되어 누구든지 집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엿볼 수 있지만, 선생님 집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 대문을 찾아 들어갈 수 없다(賜之牆也及肩,窺見室家之好。夫子之牆數仞不得其門而入). 위에서 몇길(數)을 만인(仞)로 바꾼 것이다. 이 글씨는 명대 호찬종(胡攢宗)이 쓴 글씨가 새겨져 있었으나, 청 건륭제(乾隆帝)가 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친필로 바꾸어 새겨 놓았다고 한다.

 

첫 관문인 옹성 '만인궁장'을 통과하자 벽돌로 싼 규모가 아주 큰 성문이다.  성문 양쪽으로 성벽이 이어졌다. 금성옥진방 앞에서 검표를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여권을 보여주며 경로로 무료입장을 했다. 금성옥진방 앞에 많은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해설을 듣고 있었다.

 

나도 준비해 온 확성기를 꺼내 우리 일행에게 해설을 했다. 또한 카메라맨으로 사진 촬영도 하여 무척이나 바빴다.

 

금성옥진방(金聲玉振坊)이다.  금성옥진은맹자<만장하>에 나오는 구절 중에 들어 있다. 금성옥진이란 공자가 고대 성인(聖人)들의 장점을 집대성(集大成)하여 모두 지니고 있는 성인이라는 점을 찬미하는 말이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은 성인의 찬미를 음악의 연주에 비유하고 있다. 금성(金聲)이라는 종()을 쳐서 시작을 알리고, 끝나려고 할 때 옥경(玉磬)이라는 악기를 쳐서 끝남을 알린다. 시작은 의 일이고, 끝맺음은 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 해석은 1993년에 출토된 곽점초간(郭店楚簡) 중에 오행(五行)이라는 책에서 보면 다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맹자보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자사(子思)가 지었다. 이 책에 금성(金聲)이고 옥음(玉音)이다. 은 인도(人道)이고 은 천도(天道)이다. 오로지 유덕(有德)한 사람만이 (외적으로) 금성(金聲)을 실현한 다음에 (마음에서) 옥진(玉振)을 울리게 한다.라고 다르게 해석했다.

 

 

영성문(欞星門, Lingxing Gate) 이다. 이 문은 가장 남쪽의 문이다. 영성은 옛날 전설에 천상에 있는 별(), 고대 제왕이 제사 지낼 때는 이 별에 제례를 올렸다. 공자의 위대함이 이 별과 같다고 표현 한 것이다.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이다. 이 방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이 우주 천체와 같이 순환하여 영구 존재한다는 뜻이다.

 

 

지성묘(至聖廟)이다. 이와 같이 형태로 집이 아닌 것은 방이라고 하나 특별이 이곳 지성방이라고 하지 않고 지성묘라고 한 것이 이채롭다. 지성(至聖)은 『예기(禮記)』 「중용(中庸)」의 “공자는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다.(孔子天下至聖)”라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성시문(聖時門) 이다.  명나라 때 공묘의 두 번째 대문으로 처음 만들었고 1730년 청나라 강희제의 네 째 아들이며 청나라 3대 황제인 옹정제가 이름을 지었다. 성시(聖時)맹자孔子, 聖之時者에서 따온 말로 공자는 시대를 초월한 성인이란 뜻이다.

 

 

앞에 보이는 건물이 홍도문이다.

 

 

홍도문은 목조건물이다.

 

 

홍도문(弘道門)1377년 명나라 홍무10년 세웠으며, 명나라 이전부터 원래 공묘의 출입문이었다. 청나라 옹정제가 논어의 아래 구절을 인용하여 현판을 하사했다. 人能弘道 非道弘人(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들이 천년 향나무이다. 이 향나무가 이곳을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대중문으로 일행이 들어 가고 있다.

 

 

대중문(大中門)청나라 건융제가 직접 쓴 4번째 출입문이다. 원래는 中和門이었다. 이 문을 지나면 공묘의 4번째 정원이 나온다.

 

 

동문문 앞에서 우리 일행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문문(同文門) 이다. 원래는 參同門이었고, 그 후 중용 書同文 行同倫 今天下 車同軌에서 따와 지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의 문화와 문명을 하나로 통일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현판은 청나라 건융제가 직접 썼다.

 

 

규문각(奎文閣) 이다. 고대 천문학은 하늘의 별자리를 28개 무리로 나누고, 그 중 문관의 우두머리아자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 이름을 규()라고 했다. 공자를 문장을 주관하는 별로 본 것이다. 문장과 서적을 뜻하고 많은 서적을 보관하는 건물이라고 하여 규문각이라고 했다. 1018(천희 2)에 축조되어 1504(홍치 17)1985년에 대규모 개수된 건물이다. 원래 이름은 藏書樓.

 

 

이름은 奎主文章에서 따왔다. 역대의 황제로부터 하사된 경서 등을 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단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규문각 안에서 공자 관련 서적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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