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구향교에 있는 공부자의 위패이다.
아래 글은 충남대학교 송백헌 명예교수가 수원향교 주관 "선비문화마을 가꾸기" 프로그램에서 2017년 5월 20일 강의한 내용이다.
선비정신과 그 실천
송 백 헌(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1. 조선왕조를 지탱한 근본 바탕이 선비정신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이란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법치(法治)보다는 덕치(德治)를 우선시하고 성리학의 통치철학이 조선왕조 500년을 지속시킨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 500년을 지속시킨 덕목(德目) 중 그 중요한 요체가 통치자인 왕의 인간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왕의 인간화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간형, 그것이 선비(士)이다.
선비라는 용어는 순수한 우리말인데 조선시대에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했다. 한자어로 사(士)나 군자(君子)․ 유생(儒生)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약간씩 의미와 뉘앙스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조선사회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네 개의 계층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위에 있는 것이 사(士)이고 선비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는 조선시대를 통해서 계속 지배 계층에 있었습니다. 이른 다른 말로는 양반이라고 하는데 양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선비란 어질고 학식 있는 유생’의 의미를 지닌 사람,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조선선비의 실천은 학행일치(學行一致)로 시작된다.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을 받고 매도당했다.
이러한 청렴정신은 청백리의 바탕이 되었다. 조선왕조에서 많은 청백리가 배출한 것은 바로 선비정신의 바탕에서 태어난 것이다.
2. 선비가 갖추어야할 덕목
조선 시대는 양반 사회였다. 따라서 양반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흔히 양반을 사대부(士大夫)라고도 하는데, 이는 사(士)와 대부(大夫)를 통칭한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은 그의 소설 「양반전」에서 “글을 읽는 사람을 선비[士]라 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서 대부(大夫)가 된다.”라고 하였다. ‘선비’란 벼슬하지 않고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할 수 있지만, 한 시대의 주역으로서 선비를 규정할 때에는 그 의미가 다양해진다.따라서 선비가 갖추어야할 덕목은 수없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덕목 몇 개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선비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다.
『순자(荀子)』 애공(哀公) 편에 보면 공자(孔子)는 선비의 덕목을 묻는 노(魯)나라 애공에게 "아는 것이 꼭 많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며, 말은 꼭 많이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할 말을 했는지를 잘 살펴야 하며, 행동은 꼭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옳은 행동을 했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知不務多 務審其所知 言不務多 務審其所謂 行不務多 務審其所出)라고 하였다. 즉 “선비는 많이 아는 것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며, 말과 행동도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제대로 하였는지, 옳은 행동을 하였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공자는 선비가 추구해야 할 학문과 삶의 자세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시대를 따라 선비도 긍정적 모습과 부정적 모습을 보여 왔다. 옛 시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요즘 부정적 모습의 자칭 선비가 기승을 부리니 선비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바와 같이 행할 수 있는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덕목"일 것이다.
노자(老子)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최상이요, 알고 있지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것은 병이다(知不知 上, 不知知 病)"라고 했지만...
그런데 더욱 문제는 "자신은 말하는 것과 다르게 행하면서 스스로는 그 것을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이니 이는 인격문제가 아니라 병(病)일 뿐이다.
2) 선비는 먼저 몸을 닦고 남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다.(修己安人)
선비는 도(道)를 알고 그 길을 걷는 도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바로 중도(中道)를 말한다. 중도란 희노애락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고요한 마음상태에서 절도에 맞는 길을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과 욕망 때문에 올바른 길을 걷기가 힘들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신이 필요한 것이다.
선비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어진 마음을 기르고 감정을 통제하면서, 또 한편으로 의리와 예의와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공자는 “군자는 의를 기본 바탕으로 삼고, 그것을 예로 행하고 겸손으로 표현하고 믿음으로 완성한다” 라고 하였다. 인(仁)이 인격의 바탕이고 내면의 문제라면, 의리(義理)와 예절(禮節)·지혜(智慧)는 인에서 외부세계로 표출되는 도리와 규범 및 기술과 방법에 해당된다. 비유컨데, 의(義)가 올바른 길과 방향을 가리킨다면, 예(禮)는 그 길을 가는 태도와 자세이고 지(智)는 그 길을 가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비가 인격을 연마하고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남을 위한 것이다. 즉, 자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남을 위한 공부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선비의 세계관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수신을 통해 갈고 닦은 내면의 세계를 외부 세계로 무한히 확장하는 일이다. 그를 통해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는 먼저 자신을 갈고 닦아 인격의 완성체를 이룬 뒤 집으로, 국가로, 세계로 나아가 공인(公人)으로 쓰이는 존재였다. 그런 만큼 철저한 자기 수양과 인격 도야가 요구되었다. 그와 반대로 선비가 제대로 수신이 되지 않으면, 위험한 인물이 된다. 선비는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선비가 마음을 바로 쓰지 않으면, 그의 지식은 남을 해치고 사회와 나라를 좀먹는 무기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
선비가 세상에 통달하고 벼슬살이를 하는 것은 부귀영화를 위한 것도, 사람을 통치하기 위함도 권력을 농단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인간과 세상을 편안하게 하여 행복의 길로 이끄는 매개자, 또는 안내자, 또는 정치 및 사회 지도자가 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비의 요체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선비는 단순히 세상에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해야 한다. 진정한 선비는 질박하고 정의롭고 겸손하여 집안과 세상에 통달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공후사(先公後私), 억강부약(抑强扶弱),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은 기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이타적 삶이라 할 수 있다.
3)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인격체이다.
선비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호의호식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타적 삶을 지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 단위로 모아지면서 여론이 형성되고 그 여론이 그 사회와 국가와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 때문에 16세기 이후 조선을 이끌고 간 것은 선비의 정치집단인 사림(士林)이었다.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른다.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일렀다.
이와 같이 한 시대 한 사회의 여론은 선비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사론(士論)이다. 이 사론은 선비들이 옮다고 여기는 공의(公義)로써 그들의 의리정신과 결부되어 목숨을 건 정치투쟁의 명분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만연하였던 사화나 당쟁 역시 그와 같은 선비들의 사론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그와 같은 선비들의 정치적인 역할을 매우 강조하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선비란 기본적으로 벼슬을 하는 존재로 보았다. 무릇 선비는 위로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면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존재이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거나 괴이한 행동으로 사람의 이목을 끄는 시대의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선비는 부단한 공부와 자기 수행이 뒤따라야만 하였다. 그래야 개인적인 욕망과 세속적인 안락을 통제하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시대를 이끌고 뭇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비는 세상을 등지고 혼자만의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즐기는 부류와는 다르다. 세상에 귀를 열어놓아야 한다.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귀 기울이고 올바른 사회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선비란 기본적으로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지성인이기 때문이다.
4) 선비는 청렴하고 청렴한 삶을 지향한다(淸貧樂道)
조선시대 선비는 기본적으로 세속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글 공부가 업(業)이었다. 그 때문에 청렴(淸廉)과 청빈(淸貧)한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孔子)가 “선비이면서 편안히 사는데 연연한다면 그것은 선비가 될 수 없다”라고 하였듯이, 선비는 곧고 바르게 자기 길을 갈 뿐 빈부귀천과 지위 고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맹자(孟子) 또한 “선비는 빈궁해도 대의를 잃지 않고 크게 출세해도 도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청렴과 청빈은 선비의 큰 미덕으로 칭송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선비는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가난하든 않든 독서와 학문 연구에 몰두하다, 혹 때를 만나면 치인의 길을 걷고 때가 다하면 다시 청빈한 삶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와 같은 청렴․청빈한 삶은 인간의 삶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비는 다른 어느 무엇보다도 내 몸을 갈고 닦는 수신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래서 선비는 늘 ‘경(敬)’과 ‘성(誠)’을 화두로 마음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5) 선비는 지조와 절개를 생명처럼 여긴다
조선시대 선비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선비의 성품은 기본적으로 곧고 바른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러기에 세상을 대할 때 떳떳하고, 사물을 대할 때 사사로운 물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선비는 설령 가난하고 권세가 없을지라도, 힘 있는 자에게 아부하거나 빌붙어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선비는 어떤 상황에서도 떳떳하다. 떳떳하기에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런 이유는 조선 선비들은 지조와 절개를 매우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선비들은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좋아하고 그 기상을 따르려 하였으니, 사군자란 바로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말한다.
6) 선비는 도예일치(道藝一致)를 추구하였다.
선비는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는 학인이지만,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의 결과는 문하예술 활동으로 이어진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즐기는 것은 기본이다. 즉, 풍류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선비가 글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를 짓고 낭랑한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는 경전 성독이 노래가 되고, 글을 쓰다 보면 선비의 방에서 그윽한 묵향이 풍겨 나온다. 풍광 좋은 정자에 올라 벗들과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다보면 옆에서 어느 벗이 타는 가야금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선비의 일상 문화요 풍류였다.
선비가 예술적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이나 글씨가 손끝의 잔재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갈고 닦은 글공부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예술행위였다. 왜냐하면 선비가 좋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려면, 가슴 속에서 만권의 독서량이 쌓여서 피어나는 문자향(文字香)과 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기운인 서권기(書卷氣)가 흘러 넘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도문일치(道文一致)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문일치란 도(道)의 구체적인 표현이 글이요 글씨란 의미이다. 그렇게 되려면 선비가 쓰는 글과 글씨는 단순한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라, 선비의 마음과 사상이 담겨 있어야 하고 선비가 그리는 그림, 자연의 음율(音律)이 담긴 음악 또한 그러하였다.
공자는 시(詩)와 예(禮)와 음악(音樂)을 하나의 몸통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예와 악이 몸과 마음을 닦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비는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겸비해야 하였다. 도심(道心)으로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음악을 즐기는 선비, 그것이 선비의 예술적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지성과 감성을 겸비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덕이 뛰어난 사람은 현자(賢者)라 하고, 예(藝)에 뛰어난 사람을 능자(能者)라고 하였다. 예(藝)는 기본적으로 기술이지만, 그 속에 덕이 있고 중도가 있으며 조화가 스며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선비다운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비의 풍류문화는 인문예술이 되어야 한다.
인문예술이란 인간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가 소통하고 표현되는 예술이다. 인간의 궁극적 가치인 선비의 4덕이 흐르는 예술, 철학이 있는 예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화이부동하는 예술을 말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도와 예가 하나인 ‘도예일치(道藝一致)’의 예술인 것이다.
옥산서원 강당에 걸린 백록동규 현판이다. 백록동규는 유생들이 실천해야 할 학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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