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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릉 임영관(臨瀛觀)

by 仲林堂 김용헌 2015. 6. 13.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에 있는 임영관은 입구에 ①삼문(三門; 3개로 구성된 문)이 있고, 삼문을 지나면 ② 중대청(中大廳: 중대형의 건물)이 있고, 중대청 뒤에 ③전대청(殿大廳: 왕궁의 큰 건물), ④동대청(東大廳: 동쪽에 있는 큰 건물), ⑤서헌(西軒: 서쪽에 있는 집)이 있다. 5개의 건물 중 현존하는 건물은 삼문뿐이고 나머지는 발굴하고 고증하여 새로 복원한 건물이다. 삼문은 고려시대의 문(門)으로 국보 제51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 기와건물이다.

 

임영관(臨瀛觀)의 영(瀛)은 바다를 뜻한다. 임영관은 바다에 접한 건물이란 뜻이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승려 범일(梵日)이 관사(官舍) 터에 절을 지었으나 절은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그 문만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부관(府館)을 옮겨 지음으로써 객사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염양사(艶陽寺)의 삼문(三門)을 객사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불려 왔다고도 한다. 일제는 삼문만 남기고 모두 훼손하고 이 자리에 1927-1929년 강릉보통공립학교를 세웠다. 일제는 우리의 궁궐 등 전통 문화유산은 학교를 세운다고 하든가 병원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야비하게 훼손했다.  

 

강릉선교장의 까페지기 벽산이 올린 글은 아래와 같은 같이 임영정을 헐어버리고 경찰서를 지었으며 철거 목재로 방해정을 세웠고 한다.

 

한일 합병이후 일본인들은 강릉의 유서깊은 임영관(고려시대 건물)을 

객사문만 남기고 헐어버린뒤 그곳에 강릉 경찰서를 지었다

그때 당시 건물의 철거를 분개하신 증조부께서 많은 항의를 하셨지만

일제의 만행을 저지할수가  없게되자 

철거된 건물의 목재를 수습하여 경포호수 지금의 자리에

방해정을 지으셨던 것이다 

 

주남철이 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임영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적 제388호. 1993년 강릉시 청사 신축예정 용지에 대한 발굴조사로 드러난 강릉 객사터이다.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가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 臨瀛誌》에 의하면,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되었고, 그후 1627년(인조 5) 대청(大廳)이 화재를 당하여, 1633년 부사 유문화(柳文華)가 다시 건축하였다. 그후 수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1927년에 이르렀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객사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1993년도의 발굴조사에서 고려 초기부터 중기 이후, 조선시대의 연화문 암·숫막새들과 조선시대 와편들, 11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고급 청자편들, 16·17세기의 조선 백자 및 분청자기편들이 양호한 상태로 나왔다. 이들 출토품 및 유구, 《임영지》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임영관은 고려 초기부터 1927년 1차, 1929년 2차의 강릉공립보통학교 설립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철거될 때까지 이 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에는 본래 공민왕이 1366년(무오년)에 낙산사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왔다가 길이 막혀 열흘동안 강릉에 머물렀을 때 쓴 ‘臨瀛館’ 편액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객사문에 걸려 있는 편액은 1970년대에 다시 모사 제작한 것이다. 임영관지는 1993년 이곳에 있던 경찰서의 철거로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93년 5월 10일 강릉시 청사 신축기공식 후 관상수를 옮겨심기 위하여 캐내던 중 임영관의 건물유구가 노출됨으로써 곧 발굴조사에 착수하여 사적으로 지정하게 되었다.』

 

국보51호 임영관삼문(臨瀛館三門)은 다행히 잘 보존되었고 나라에서는 국보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을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미술조각품을 만든 600여년 전 우리 조상의 슬기를 엿볼수 있다. 더구나 이 건물은 본체가 아닌 문으니 본체 건물은 얼마나 훌륭했을가 미루어 짐작된다. 그러나 이 건물 바로 앞에 길이 지나 간다. 이렇게 훌륭한 건물을 돋보기게 못할 망정 흠집을 내고 있으니 무례이다.  

임영관삼문에 걸었던 현판은 공민왕 친필로 알려져 있다. 임영관을 복원한 후 삼문에 있던 현판을 떼어 제자리에 걸었음도 의미가 크다하겠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명절에 임금께 1896년 대한제국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궐례(궐례)를 하였다고 한다. 궐례홀기가 있느냐고 해설사에게 묻자 모른다고 한다. 없어진지 100여년밖에 지나지 않아 분명히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궐례 홀기가 있다면 궐례를 초하루와 보름날 재현해 보는 행사를 갖는다면 관광객에게 큰 볼거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삼문 앞에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 있다.

 

임영관은 ⑤ 임영관 삼문, ⑥중대청, ⑦전대청, ⑧동대청, ⑨서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청이다.

 

가운데 높은 집이 전대청이고, 전대청의 좌측이 서헌이고, 우측이 동대청이다.

 

 

궐례의식 장면 같다. 위패에 전(殿: 대궐 전)이라고 쓰여졌다. 임금 이름을 직접 쓸 수 없으니 전이라 쓴 듯하다.

 중대청(中大廳) 뒷편에 있는 임영관이다. 이 건물은 중앙에서 파견된 신하가 직접 임금을 뵙수 없으니 임금이 계신 대궐이라는 임금위패를 모시고 임금의 명령을 알리거나 취임인사를 하는 곳이다. 임금이 계신 곳으로 이 대호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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