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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판교공파

애국지사 김용창선생 추도식 거행

by 仲林堂 김용헌 2015. 6. 11.

애국지사 김용창 선생의 추도식이 6월 11일 11시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상두리 기념동상 앞에서 화성시 독립유공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금년 행사는 요즘 메르시바이러스 발생으로 지역행사로 축소하여 치러졌다. 행사는 국민의례, 묵념, 선생의 친동생인 김용무님이 초헌, 전 화성시장 김일수님이 아헌, 수원화성오산 광산김씨종친회장 김용재님이 종헌하였고, 그리고 본인이 광산김씨판교공파종회 회장으로 헌작하였고, 참석자 여러분이 헌화하였다. 김일수 전 화성시장의 추도사가 있었다. 김전시장은 유행병으로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이렇게 찾아 주신 여러분에 감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독립지사 용창선생은 애국하는 의로운 정신으로 일제 맞서 싸우다 19살에 감옥에서 돌아가셨다며 불굴 정신을 기린다고 했다. 이런 훌륭한 분의 배출은 이 마을과 나아가  화성의 자랑이라고 했다. 또한 광산김씨의 자랑이라도 했다. 선생은 광산김씨 판교공의 후손이다. 이날 행사에 화성시노인회밴드의 연주는 분위기를 북돋았다. 

 

선생은 192683일 수원군 향남면 상두리 222번지에서 광산김씨 판교공파 아버지 김언수(金彦洙)와 순천박씨인 어머니 박종례(朴鍾禮)3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고향에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 2년 동안 강습소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1933821일 향남공립보통학교에 진학하여 1937년 동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였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로 고학 길을 떠났다. 194110월 김용창은 상경하여 덕수공립상업학교 야간반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환,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19436월 동 근무지의 대우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있음을 알고, 이 때부터 한국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 후 19444월 중순경 같은 학교 동료인 김익설에게 조선총독의 민족차별 정책을 비난하였으며, 5월에는 보험관리 사무실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미국, 러시아, 상해 방면에서 조선인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쫓아 버릴 작정이다. 이번 전쟁에 일본이 패한다 하더라도 조선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못 이기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노략하였다. 또한 동년 5월 초순 보험관리소 대변소의 판자벽에 연필로 반도 2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 라고 써 붙이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다가 소위 치안 방해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412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4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맨 앞에 있는 분이 선생의 친동생 김용무님이며, 광산김씨판교공파종회 부회장이다.

 

앞줄 우측이 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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