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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金氏 이야기

광산김씨대종회 임원 강화 충렬사 방문

by 仲林堂 김용헌 2014. 10. 24.

광산김씨대종회 임원단합대회가 20141011-12일 인천과 강화도에서 있었다. 첫날 인천 자유공원과 유람선 관광을 한 후 전등사 근처 로얄유스호스텔에서 숙박하고, 일행은 버스 3대에 나눠 타고 전등사와 광성보를 관람하고, 강화군 신원면 선행리 37 충렬사를 방문했다.

 

충렬사는 1642(인조 20)정묘호란 때 강화도에 청나라군 과의 전쟁에서 순절한 충신 우의정 김상용 등 29위가 배향된 사당(제사 지내는 집)이다. 청태종은 16361210만대군 으로 10여일 만에 한양 도성 근처까지 처들어오자 봉림대군·인평대군 두 왕자와 비빈·종실·조신들을 강화로 피난했다. 청나라군은 16371월 강화를 침입하여 결사 항전했으나 강화성은 청나라 군이 쏘는 화포에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고 만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고전을 하는 중에 강화유도대장(江華留都大將)인 김상용(金尙容)이 남문에 화약궤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자분(自焚: 화약을 폭발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음)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을 지냈던 윤방(尹昉)이 이 사실을 알고 달려와서 애써 만류하였으나, 권순장(權順長)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

 

이때 성균관 생원 김익겸(1614-1636)도 김상용을 따라 죽는다. 그의 나이 겨우 22세이다. 그는 젊은 나이인 21(1635) 생원시에 장원 급제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다. 그때 그의 부인 해평윤씨는 5살 어린 아들과 유복자가 있어 차마 따라 죽지 못한다. 그의 두 아들은 홀어머니 해평윤씨의 가르침에 따라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둘 다 대제학에 오르게 된다. 이 두 사람이 광산김씨를 빛낸 서석 김만기와 서포 김만기 두 형제이다.

 

충렬사에 배향된 29위 중에 우리 광산김씨는 김익겸과 함께 매죽한 김득남(金得男), 591-1637)이 있다. 그의 부친은 김억창(金億昌)으로,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장이 매우 컸으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서천포만호(舒川浦萬戶)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함녕군(咸寧君) 이항(李沆)을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앞장서서 입궐하였다. 그는 옥새를 주어 그의 공으로 삼지 않고 그 공을 이항에게 돌렸다. 그는 그 공으로 사도첨사(蛇島僉使)에 제수되었다. 1635(인조 13) 형조의 절충(折衝)으로 있을 때, 화적인 민수이(閔守伊)를 잡아 공을 세웠다.

 

그가 한강의 철곶첨사(鐵串僉使)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강화도에 청나라 군사가 침입하였다. 그는 한양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길목인 부평(富平)에서 청군이 민간인을 포로로 잡아가자, 그들을 탈환할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자원하는 군사가 없었는데, 그는 홀로 자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당시 대군으로 있던 효종이 그에게 백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는 양정(梁挺)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나와 부평 근처에서 적에게 항전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증한성판윤(贈漢城判尹)을 내려주었고, 강화 표충사(表忠祠)에 제향하게 하였다. 그의 아들인 김방보(金邦寶) 역시 무장으로 난포만호(蘭浦萬戶)를 역임하였다.

 

자랑스럽게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순절한 광산김씨 선조가 모셔진 사당 방문은 광산김씨로서 큰 자긍심을 심어주웠다.

 

 

충렬사 사당안으로 들어 가는 일행

충렬사의 도유사이며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남중선생께서 해설하고 있다. 김도유사도 광산김가이다.

충렬사이다. 충렬사는 이곳 강화 이외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충정공 김익겸의 위패가 가운데 있다. 贈領議政은 돌아 가신 다음에 내리는 追尊이다. 실제 영의정을 한 것이 아니라 영의정과 같이 훌륭하다고 나라에서 높여주는 관직이다. 忠正公은 임금이 내려 주는 시호(諡號)이다. 忠은 충신을 뜻하며, 正은 바르다는 뜻으로 아주 높여 주는 시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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