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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서원

충절현을 모신 충곡서원

by 仲林堂 김용헌 2014. 8. 7.

충곡서원은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 산13에 위치하며 근처에는 계백장군의 묘소와 탑정호 수변공원이 있다. 이 서원은 숙종 6(1680)에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종 8(1871)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35년 재건되었으나 사우(祠宇: 신주를 묘셔 놓은 집)만 남고 멸실되었던 것을 그때의 초석에 따라 1977년 동재(東齋: 유생들이 거처하면 글 읽는 동쪽집)와 서재(西齋: 유생드이 거처하면서 글 읽는 서쪽집) 외삼문(外三門: 밖에 3칸 문) 등을 재 건립하였다.

 

아래 글은 충곡서원에 관하여 논산시사(論山市史, 2005) 기록을 일부 보완하였다. 1692(숙종 18) 논산시 부적면 수락산 서쪽 산록(山麓)에 건립되었으며 처음에는 계백(階伯),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익겸(金益兼) 8인을 제향하였다.

 

1680년 한양촌에 성삼문 사우를 창건했다. 1692년 사우를 이전하며 6신을 배향하고 육신서원(六臣書院)이라 불렸다. 1702년 계백과 김익겸을 배향한 후 팔신서원(八臣書院)이라고 했다. 숙종 대의 노론 중진 송상기(宋相琦) 문집에 연산 육신서원의 상량문(上梁文)이 실려 있다. 이 상량문에 육신서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사육신만 제향되었고 나중에 계백과 김익겸을 추가하여 8현서원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계백을 추가하게 된 것은 이곳 충곡리에 계백의 무덤이 있으며 이 고장의 충신으로 주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김익겸을 추가하게 된 것은 대제학과 형조참판을 지낸 김만기의 영향으로 본다. 김만기는 김익겸의 아들로 숙종의 장인이다.

 

본 서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인(武人)인 계백이 주벽(主壁)에 제향 되어 있다는 점이다. 제향인물들의 공통점은 거의 충절인(忠節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박팽년 등 사육신과 계백 모두 충절인이며 김익겸도 병자호란 때 강화읍성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그러나 본 서원은 후대로 내려오며 배향인들이 크게 증가하여 지금은 모두 18일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의 8인 이외에 10인이 더 추배된 것인데 김정망(金廷望), 김홍익(金弘翼), 박정(朴種), 이민진(李敏進), 조병시(趙秉始), 김만중(金萬重), 김자빈(金自鑌), 이현동(李賢童), 이학순(李學純), 박증(朴增) 등이 그들이다.

 

[배향 인물]

1. 주벽-계백(階伯, ?~660)

백제 말기의 명장이다. 서기 660년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당 연합군 백제를 침공할 때 백제와 당과는 금강 하류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와는 황산벌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다. 이 때 계백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거점을 두어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대와 싸워 초기에는 모두 승리하였으나 신라에서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 등장하면서 형세는 역전되었다계백의 황산벌 출전은 승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싸우다 죽겠다는 결사의 계책이었다. 그는 두 나라의 대군을 맞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처자가 적에게 잡혀 욕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칼을 뽑아 처자식을 죽이고 최후의 결전에 나섰던 것이다. 결국 신라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5천 결사대와 함께 황산벌에서 전사하였다계백은 지()·()·()을 겸비한 장수로서 품계는 달솔로 좌평 다음가는 2품 벼슬이다. 그의 묘소는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 4번지에 있다.

 

2. 박팽년(朴彭年, 1417~1456)

박팽년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인수(仁叟)이고,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며, 본관은 순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1434(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뒤 그를 형조참판으로 임명했으나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 처형되었다. 숙종 때 누명을 벗고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3.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성삼문은 조선조의 충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1438(세종 20)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이 신숙주, 박팽년, 최항, 이개, 하위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집현전학사로서 동참하였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몸이 약하여 1년도 못되어 승하하자, 세종의 손자인 단종이 어린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의 찬탈을 음모하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먼저 문종의 고명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공신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기뻐하지 않았다. 1455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강제로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았으며 이 때 예방승지로 있던 성삼문은 국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수양대군이 왕이 된 후에도 성삼문을 비롯한 충신들은 끈질기게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456년 명나라의 사신을 초청하는 환영식의 날을 기하여 상왕(단종)의 복위를 위해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수립했으나 거사 며칠 앞두고 김질의 변절로 탄로나고 말았다.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받았으니 이들이 곧 사육신이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삼빙, 삼고, 삼성의 세 동생과 맹첨, 맹년, 맹종 및 갓난아기 등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성삼문이 죽음을 당한 후 집을 몰수하여 뒤졌을 때 1455년 이후 나라에서 준 쌀은 하나도 먹지 않고 녹()이라고 써서 붙인 채 창고에 쌓아 두기만 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1758(영조 34) 성삼문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충문(忠文)이라 하였다. 논산 지방에는 본 서원 외에 금곡서원에 제향처가 있고 가야곡면에 성삼문 사당이 따로 세워졌으며 또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에는 성삼문의 일지체(一肢體)가 묻혀있는 묘소가 있다.

 

4. 이개(李塏, ?~1456)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이고,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며, 본관은 한산이다. 1436(세종 18)에 등재, 1447(세종29) 중시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에 들었고,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문(時文)이 청절하여 이름이 높았다. 1456(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피살되었다. 당시 이개가 읊은 시는 충절을 잘 드러낸 명시로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자백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대답하지 않았으며 평소 숙부인 이계전(李季甸)이 세조에게 내왕함을 항상 경계하였다. 혹심한 형벌을 받는 동안에도 안색조차 변함이 없어 보는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1758(영조 38)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5. 유성원(柳誠源, ?~1456)

유성원은 조선조의 학자로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낭간(琅玕)이며, 본관은 문화이다. 1444(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세종 29)에는 중시에 합격, 집현전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1455(세조 1)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교서를 만들어 그 훈공을 기록하려고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했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 끝에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하였다고 한다. 1456(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金礩)의 변절로 탄로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잔을 나누고 조상의 사당 앞에서 칼로 자결했다. 숙종 때 시호를 절의(節義)라 내렸고, 영조 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다.

 

6. 하위지(河緯地, 1387~1456)

하위지의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라 하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145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성미가 과묵하고 공손했으며 항상 집현전에서 경연(經筵)에 왕을 모시며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종의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편찬에 착수했는데 당시 수양대군이 이를 총재(總裁)했었다. 이 책이 1453(단종 1)본에 이르러 간행되니 수양대군이 왕에게 청하여 편찬에 공로가 많은 신하들에게 가자(加資)하게 하였다. 하위지는 당시 집의(執義)로 중직(重職)에 승진했으나 이를 굳게 사양하며, 임금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위태로운데 왕족(수양대군)이 조신(朝臣)들을 농락하면 안 된다고 간하였다. 1453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전 사간(前 司諫)의 자격을 가진 채 선산(善山)에 물러가 있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하위지를 예조참판으로 누차 부르자 마지못해 취임은 했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다 쌓아 두었다 한다. 1456년에는 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나 체포되었다. 사육신의 변이 일어나자 세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은밀하게 그가 모의한 사실만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7. 유응부(兪應孚, ?~1456)

자는 신지(信之) 또는 선장(善長)이고, 호는 벽양(碧梁)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체격이 좋아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에 능했으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평안도 절제사를 지냈고, 1455(세조 1) 동지중추원사로 정 2품에 올랐다.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는 연회 장소에서 직접 세조를 살해하는 임무까지 맡았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잡혀 심한 고문 끝에 죽었다. 학문에 뛰어나 당시 절의파(節義派) 학자로 알려졌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충곡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8. 김익겸(金益兼, 1614~1636)

조선조의 문신으로 자는 여남(汝南)이고 본관은 광산이고, 김장생의 손자이자 김익희의 아우이다. 1635(인조 13) 생원이 되었다. 1636년 후금의 태종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확(李廓)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귀국할 때 청나라 사신 용골대가 같이 동행하였다. 이에 김익겸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명과의 의리를 위해서라도 청을 인정함은 잘못이며 오랑캐 조정에 가서 축하함으로 국위를 손상한 이확과 청 사신 용골대는 주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청하였다. 그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병(淸兵)에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강화로 가서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 김상용을 따라 남문에 올라 분신자결하였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9. 이현동(李賢童)

호는 농맹아(聾盲啞)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조선시대 익안대군 방의(芳毅)의 증손으로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비록 왕손의 몸일지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의 문인으로 그의 아들 김종직과 도의교분이 두터웠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인품을 칭찬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겼을 때 탄식하고 울면서 귀로 차마 들을 수 없고, 입으로 차마 간할 수 없고,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다.”하고 농맹아라 스스로 호를 짓고 흥인문 밖에 퇴거하니 곧 그의 별장이다그로부터 얼마 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화를 입고 또 단종이 죽음을 당하니 더욱 상심되어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그는 서울의 소요를 피하여 연산조령(連山鳥嶺)에 은퇴하여 평생을 북쪽으로 향해 앉은 일이 없고 자녀들에게도 벼슬을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며 이를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10. 박증(朴增, 1461~1517)

자는 익지(益之)이고, 호는 암천(岩川)이며, 본관은 무안이다. 후인들은 박증을 평해, 천성이 청렴 강직하고 충효를 대본으로 처세하였던바 성삼문 등 사육신과는 처지는 달랐어도 뜻은 같았다고 한다. 사육신이 화를 입을 때 세상을 피하여 자기의 절개를 지켜 변함이 없으니 이율곡과 윤용서, 윤석호 등 제현이 극구 칭찬하되 절의를 내세워 기강을 붙들어 그 소리를 듣고 악한 사람이 착하게 되고 약한 사람이 뜻을 세울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는 바 박증이 거의 그런 인물이라고 했다.

 

11. 김정망(金廷望)

자는 숙우(叔遇)이고 호는 삼육재(三六齋)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김성휘의 손자로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관직은 영동현감을 역임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처신이 단정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향상 효우(孝友)에 대한 책을 지녔고 손바닥에는 언제나 효우 두 자를 써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여의치 않자 손가락을 찢어 수혈하였으며 밤에도 옷은 물론 허리띠까지도 풀지 않으며 경계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했을 때는 죄인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으랴?”하고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부친을 애도했다고 한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하였고, 1673(현종 14) 양촌에 정려가 세워졌다.

 

12. 김만중(金萬重, 1637~1692)

조선조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서포(西浦)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앞에 제향 된 김익겸의 유복자로 모친 윤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1665(현종 2)문과에 장원하여 정언, 지평, 수찬, 교리를 역임했으며 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지방과 삼남일대를 순시하였다. 이듬해에 겸문학(兼文學), 헌납(獻納)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등장하여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서인에 가담하였고 이로 인해 서인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후에 재등용되어 예조 참의, 공조 판서를 거쳐 대사헌까지 이르렀으나 조지겸 등의 탄핵을 받아 다시 전직되었다. 1685년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그 해에 숙원 장씨 모친과 친근한 조사석의 출세가 여인들 때문이라고 직간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 다음해에 장씨가 왕자(경종)을 출산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왕자를 출산한 장씨를 희빈으로 올리고 그의 아들 균을 원자(元子)로 삼으려는 숙종의 노력에 대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반대하면서 민비가 아직 젊으니 기다려 볼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로 인해 송시열은 제주도로,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된 것이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병을 얻어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유명한 구운몽은 이때 유배지에서 집필된 것으로 노모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라 한다. 1698년 관작이 복구되었고 1706(숙종 32) 효행에 대한 정표(旌表)가 내려졌으며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작품으로는 구운몽외에 사씨남정기·서포만필(西浦漫筆)·고시선(古詩選)등이 있다.

 

13. 김홍익(金弘翼, 1581-1636)

호는 묵재(黙齋)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인조 때 연산현감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다가 경주 쌍령에서 적병을 만나 전투 중 순절하였다. 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증직(贈職)하였고,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하였다.

 

14. 김자빈(金自鑌, 1603-1636)

자는 이중(而重)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서(經書)와 병략(兵略)에 통달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을 때 충청도 관찰사를 따라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수차 진군하였다. 앞에 제향된 연산 현감 김홍익이 김자빈의 숙부가 되며 숙부와 더불어 광주 금천에서 적병을 만나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판관(判官)에 추증되었다.

 

15. 이민진(李敏進)

자는 자선(子善)이고 호는 백봉(白峰)이며, 본관은 가평이다. 29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께서 남한산성에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조직, 무려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현감 김홍익과 함께 출전하였다. 출전 시 이민진은 검은 행전과 버선을 신고 나갔는데 이는 죽기를 맹세한 것이었다. 결국 광주 험천(險川)에서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주인이 죽자 노비인 양상과 귀상이 검은 행전으로 상전의 시신을 알아보고 찾아 운구해 왔다고 한다.

 

16. 박종(朴種)

호는 목과옹(木瓜翁)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사후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추증되었다.

 

17. 조병시(趙秉始, 11837-1911)

자는 치선(致善)이고, 호는 인제(忍齊), 본관은 양주이며 연산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마음씨가 착하여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온순한 성품과 웃어른을 대하는 예의범절이 남달라 주위에서의 칭송이 대단하였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숭릉참봉(崇陵參奉) 벼슬에 올랐으나 한 분뿐인 모친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 속에서도 모친을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노쇠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고 조병시의 극진한 병간호에도 불구하고 운명하였다. 그 후 생일을 맞아 성찬을 차렸으나 목이 메어 먹지 못하고 부모의 묘로 달려가 종일 통곡하였다. 그의 효성에 감동한 향민들이 본 서원에 배향을 추진하여 봉안되기에 이르렀다.

 

18. 이학순(李學純, 1843~1910)

자는 경실(敬實)이고, 호는 회천(晦泉)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1843(현종 9) 전북 완산에서 태어나 공주 대장리에서 살다가 부적면 충곡리에서 거주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도들이 이학순의 가입을 권유했으나 거절하자 그의 장남 이내수(李來修)에게 극형을 가하면서 위협을 했다. 그러나 이학순은 오히려 엄하게 꾸짖으며 동학에 입당하느니 차라리 내가 자살을 하겠다하여 동학을 물리쳤다 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학순은 불편을 느끼면서도 일본인들이 만든 성냥이나 석유, 사기그릇 등의 일용 생활품을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일제는 소위 양로은사금(養老恩賜金)을 주겠다고 초청했으나 이것마저 거부하자 일본 헌병 대장이 직접 찾아와 협박하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학순은 조선국 일민(逸民)이다. 불행이 망국하여 임금이 욕을 당하셔도 싸워볼 생각을 못하였고 또한 죽는 의리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육(萬戮)을 당할 것이요, 원수의 나라에서 무의(無義)로 주는 금전은 받을 수가 없다. 만일 나에게 강제로 준다면 서산으로 들어가거나 동해를 밟으리라라고 글을 서주니 헌병 대장은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학순이 계속 식음을 전폐한 채 일제에 항거하니 일제는 장남 이내수, 차남 이내준, 손자 이욱 등을 차례로 유인 은사금을 받을 것을 권고했으나 모두가 거절하였다. 그 후 이학순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랠 길 없어 끝내 임종 시를 써 놓고 독약을 마신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대명산 아래 정려를 세워 추모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 공로 훈장이 추서되었다.

 

[성삼문 선생 유허비]

충곡서원이 이목을 끄는 것은 성삼문선생유허비이다. 성삼문 유허비가 왜 여기에 있을 까?  궁금했다. 이곳 서원에 배향된 사람 중 박증은 성삼문의 외손자이다. 박증은 본관이 무안(務安)이고, 아버지는 박임경(朴臨卿),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이다. 어머니 창녕성씨는 사육신 중의 한 분인 성삼문의 딸이다. 박증의 후손은 지금도 충남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많이 살고 있다. 

 

성삼문은 딸이 사는 학당리에 여러 차례 방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당리와 멀지 않은 충청도 관찰사공 김약채의 세거지 연산 고정리와 그의 별지가 있는 충곡리 한양말과 그의 조상묘가 있는 충곡서원이 있는 곳도 여러 차례 방문했을 것으로 보인다. 

 

충곡서원은 세운 1680년은 숙종의 장인되는 서석의 나이는 47세며, 그 당시 대제학으로 훈련대장으로 있을 때이다. 아마도 서석 김만기는 먼저 사육신을 모시고자 육신서원(六臣書院)을 세운 다음 계백(階伯) 과 자신의 부친인 김익겸(金益兼)을 배향하고 팔현서원(八賢書院)이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홍살문이다. 홍살문 바로 옆에 큰 정자나무가 있어 좋으나 민가가 있는 게 흠이다.

 

밖에서 본 외삼문이다. 태극문양이 선명하나 충곡서원이란 현판 글씨는 약간 변색되었다.  

 

안에서 본 외삼문이다. 좌측편 비석이 성선생유허비이다.

 

매죽헌 성삼문 유허비다.

 

이 유허비는 송시열이 짓고 김만기가 새겼다.

 

이 서원을 재건 할 때 성금을 낸 사람이다. 이 중에는 충문공 매죽헌의 방계손이 있고, 충정공 박증의 방계손이 있다.

 

동제

 

서제

 

18현의 신위를 모신 충곡사 사당이다.

 

충곡서원은 매죽헌 성삼문 유허비가 있는 곳으로 성삼문과 외손자 박승이 모셔져 있는 곳으로 성삼문과 관련이 깊은 서원이다. 또한 광산김씨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이 서원에 배향된 분 중에 김익겸은 사계의 손자이고, 김만중은 사계의 증손자이다. 그리고 김정망과 김좌빈은 사계의 문인이며, 김정망은 좌의정공 김국광의 6세손이과 김자빈은 공안공 김겸광의 6세손이다. 유허비를 지은 사람은 사계의 문인인 송시열이고, 새긴 사람은 증손자 김만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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