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

진주남강과 기생 논개

by 仲林堂 김용헌 2013. 7. 30.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이끄는 일본 정예 대군은 1593년 6월19일부터 29일까지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천일, 황진, 최경희가 이끄는 3장사와 7만명은 왜군에 맞서 항전했으나  군사가 과부족으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 때 왜군에 짓 밟힌 우리 조선 백성의 비통함은 어찌 말을 할 수 있으리라!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으리라.  

 

기생 논개는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 많은 충신의 원한을 값기 위하여 1593년 촉석루에서 왜군의 장수를 강가 바위로 유인해 함께 왜장를 강물에 빠져 죽게하고 자 왜장을 붙잡고 뛰어 내려 자신도 순절했다. 경상우수사 남덕하는 1760년 논개의 의로운 순국을 기리기 위하여 의기사(義妓祠: 의로운 기생의 제사지내는 곳)세웠다.  그 후 2차례 중건하였고,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시민의 모금으로 지었다고 한다. 촉석루도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으며, 의기사도 시민의 성금으로 세웠다는 점은 진주시민의 나라에 대한 충성이 얼마나 깊은 가를 말해주고 있다.   

     

의기사(義妓祠)에 모셔진 의기 논개의 초상화이다. 논개는 비록 천한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죽어간 우리 조상의 원한을 값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 던졌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왜군에 맞서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채  피난하기에 급급했다. 이 나라를 구한 것은 논개를 비롯한 백성들이었다. 이순신과 같은 훌륭한 장군도 있었지만 수 많은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받친 논개의 애국정신은 길이 길이 기려야 할 것이다. 

 

촉석루 바로 아래 의기 논개가 몸을 던진 곳에 논개의 비석에 비각을 세웠다.  

 

 의암(義巖)이라! 세상에 어디 이 바위 말고 의로운 바위가 또 어디 있을 까? 조상들은 논개가 떨어진 바위의 이름 조차 의로운 바위라고 새겼다. 논개의 한 목숨 사라졌지만 그의 충절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의암이라고 쓴 글씨를 찾아 보려 했지만 낭떨어지기라서 볼 수는 없었다. 당국에서 바위에 새긴 글씨를 사진이라도 찍어 간판에 붙여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0. 5. 14. 오전. 촉성루 방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