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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주 남산

by 仲林堂 김용헌 2013. 7. 29.

경주 남산은 아래 설명에 있듯이 경주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수 많은 불교 유적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이나 이집트 문명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유적이 찬란하게 꽃 피운 신라의 문화를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경주 일원에서 남산이 아마 가장 많은 유적이 있는 곳이다. 비록 좋은 문화재는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듯이 도굴되거나 강탈 당해 가 없지만 비록 돈 안되는 유적의 수는 많다. 남산 유적을 보면 시시하다고 하는 생각도 들지만 좋은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도 해 본다. 

   이곳에 절이 122개 였다고 하니, 얼마나 불교가 융성했나 짐작이 간다. 

   

  우리 일행은 2010년 10월 31일 경주 남산의 일부만 둘러 보았다.    

 

 바위에 6명의 부처를 새겼다. 좌측 부처님 3분은 현세고 우측 부처님 3분은 래세라고 한다.  

 석굴암의 부처와 형태가 유사하다고 한다. 볼은 도톱하고 온화한 모습이다. 잘 생긴 코는 떨어져 나갔다. 아들 낳아달라고 부처의 코를 가루 내 먹어 없어진 것이라고 하고, 유교도가 불교유적을 훼손한 것이라고도 한다.   

 소나무 밭이다. 소나무가 바르게 크지 못하고 삐뚤 삐뚤 컸다. 왜 그럴가? 궁금해 한다. 그 이유는 이곳 숲은 황폐하여 소나무가 클 때는 햇빛을 사방에서 받으며 자라 나무는 곧게 자라지 못하고 햇빛을 쫒아 이리 저리 자랐다. 지금은 숲이 형성이 되어 햇빛을 좋아하는 소나무는 햇빛이 숲 사이로 나 있어 햇빛을 많이 받으려면 곧게 자라게 된다. 앞으로 이 숲이 100년간 지속된 다면 그 때 소나무는 쭉 쭉 뻗은 미끈한 소나무가 될 것이다.

 후백제의 견휀에 의하여 목숨을 잃은 경애왕묘라고 한다. 삼국통일 후에 신라의 세력은 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백제군이 신라의 수도까지 침입하여 왕까지 죽였다고 하니 그 당시 신라는 융성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경주에 155기의 능이 있으나 이름을 아는 무덤은 4개 정도밖에 없다고 하니, 그 당시만 해도 기록문화가 없었던 것이다. 한문이 들어 왔으나 이두를 썼으며, 극히 일부만 한자를 사용했던 것 같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시대에 비하면 너무도 암흑시대였다.

 머리가 없는 부처. 아마 머리가 있으면 벌써 누군가 가져 갔을 것이다.

 바위에 새긴 매애불이라라서 누가 가지고 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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