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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왕릉에 버금가는 윤관 장군의 묘

by 仲林堂 김용헌 2019. 3. 21.

파주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3월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 윤관 장군묘를 찾았다. 혜음로 도로변에 인접해 있어 접근이 쉬웠다. 주차장에 들어 묘역을 둘러 보니 규모가 대단하다. 그 규모가 왼만한 임금의 릉보다 훨씬 크다. 윤관 장군이 위대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후손이 잘 나가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묘역도 넓을 뿐만아니라 석물이 많고 컸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흥하던 시대로 화장을 하고 매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묘가 거의 없다. 윤관의 묘는 고려시대의 보기 드문 묘라고 할 수 있다. 


이 묘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윤관 묘 뒤에 청송심씨의 묘역이 있었다. 이곳이 원래 윤관 장군의 묘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한 윤관의 후손인 파평윤씨 가문이 청송심씨의 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윤관장군 묘의 곡담을 높게 설치하면서 두 가문이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 후  두 가문은 파평윤씨가문에서 2,500평의 땅을 제공하기로 하여 타협하고 청송심씨 묘는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윤관 장군은 여진을 물리쳐 두만간 넘어 700리까지 몰아내고 9성을 축조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화평을 하기로 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왜냐하면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도 화평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9성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할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있었다.


홍살문이다. 묘가 엄청난 규모이다.



좌측은 윤시중의 교자총(가마 무덤)비이고, 우측은 윤시중의 전마총(말 무덤)이다. 나는 가마와 말 무덤은 처음 여기서 본다.


고려문하시중 검평백 문숙공 윤관 장군 신도비


사당 외삼문이다. 사당은 문이 잠겨 출입할 수 없었다.


청송심씨문중이 묘를 이전할 수 있는 대토 2,500평을 받고 화해했다는 내용이다.



가까이 본 윤관 묘역이다. 임금의 묘보다 석물이 더 좋다.


가운데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근래에 세운 석물로 보인다.

 

본래 있던 문인석이다.



이곳에 청송심씨의 묘가 있던 자리이다.


곡담이 높이 쌓아 청송심씨의 묘의 전방이 가려 싸움이 시작되었다.


묘 앞에서 바라 본 전면이다. 좌청룡 우백호는 찾을 수 없다.


묘역 동쪽에 시비원(詩碑園) 표지석이다. 이곳에 윤관장군을 칭송하는 한시를 지여 돌에 새겨 전시한 공원이다.


시비(詩碑) 공원까지 조성했으니 대대한 가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숭조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과시하려는 하나의 사치로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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