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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상식

지하에서 핀 만두 꽃, 조병희 여사

by 仲林堂 김용헌 2019. 2. 15.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하나 60-70년대에 비하여 풍요로운 세상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그 시절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게 살았다. 자신을 희생하며 진학을 포기하고 부모형제를 위하여 산 사람이 많았다. 그런 분 중에서 특히 조병희 여사는 하늘이 주신 착한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 승리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다음은 조병희 여사가 걸어온 이야기이다.

 

부모님은 6.25 때 서울에서 충남 서산군 부석면으로 피난 나와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육성회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아버지께서 자식 가르치는 열망은 컸으나 상급학교로 진학할 처지가 아니었고, 시집을 갈 때까지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 때 공부 못한 게 한이 되었다.

 

인근 마을 종갓집 맏이에게 시집갔다. 결혼 직후 남편은 취직이 되어 서울로 갔고시집에서 시부모님을 모시며 1년간 농사를 도우며 살았고,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영등포구 신당동 산동네에 30만 원짜리 전세 집을 얻어 새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물이 안 나오는 고지대 집이라서 아래 마을로 물을 동량하여 길어다 썼다. 그 때 물 주면 복이 나간다고 물을 주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물을 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물 때문에 너무 고생이 많아 처음 집을 살 때는 우물이 있는 집이 첫째 조건이었다.

 

당시에는 보따리 옷 장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찾아오면 그들에게 물 한 컵 주면서 따뜻하게 대하여 주었다. 그 때 남의 집 찾아다니는 그 분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그래도 물도 없는 집에서 사는 게 힘들었지만 남편 직장 있고 그런대로 알쏭달쏭한 신혼생활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아무 대책도 없이 직장을 그만 두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가나? 참으로 난관이었다. 남편은 종가집의 장손으로 어려움이 없이 자라 조금만 힘들면 견뎌내지 못했다. 남편의 벌이가 없으니 자신이 부끄러운 체면 벗어던지고 보따리 장사로 나섰다. 새벽 4시에 남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도매로 떼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았다. 이렇게 3년을 장사했으나 겨우 살았을 뿐이지 돈은 벌리지 안았다. 옷은 외상이 많고, 계절마다 신상품이 나오며 지난 상품은 덤핑으로 나와 재고가 있으면 제값 받기 어려워 이문을 남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았다. 삼성전자에서 수원에 처음 공장을 짓고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였다. 남편은 선반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응모하여 다행히 합격하여 취직이 되었다남편이 직장을 새로 잡아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했고, 서산 시골에 계신 시부모님을 수원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나 남편은 그 좋은 직장도 얼마 다니지 않고 또 그만 두었다. 평생 남편은 무슨 일이든 잘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백화점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상가를 분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문 영동시장의 지하상가를 분양받았다. 지하상가는 지하 1층으로 네모진 가운데에 음식을 하는 주방이 있고, 그 각각의 면에 하나씩 분식코너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코너로, 좌석은 12석으로 작은 상가였다. 비록 이 작은 음식점 코너이지만 이곳이 바로 내 인생의 꽃을 피운신화만두가 태어난 곳이다.


그곳에서 온 정성을 쏟아 24년간 수원에서 유명한 만두 명소가 되었다. 오직 손님만 생각하고, 손님이 좋았다. 음식 재료 들어가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손님이 맛있어 하면 그렇게 좋았다. 손님이 오면 먼저 관상을 보고 입이 크고 체격이 크면 음식을 많이 주고, 입이 적고 체격이 작은 사람은 음식은 적게 주되 더 정갈하게 줬다. 만두를 주문한 사람은 옆 사람이 냉면을 먹는 것을 보면 냉면이 맛있어 보이는 게 사람의 심리이다. 또 냉면을 주문한 사람은 만두가 맛있어 보인다. 만두를 시킨 사람은 덤으로 면을 주고, 냉면을 시킨 사람은 덤으로 만두를 줬다.

 

맛이 있다는 입소문이 나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한번 온 사람이 다른 가족이나 친구를 데리고 오고, 또 어떤 고객은 결혼하여 그 자녀들을 데리고 오고, 그 자녀는 또 친구를 데리고 오는 식으로 연줄연줄 고객이 구름같이 몰렸다.

 

한편 많은 손님에게 음식을 만들어 내기란 쉴 틈이 없는 힘든 일이었다. 너무 손을 많이 움직이니 피가 통하지 않아 손이 마비가 되어 벌겋게 되었고, 굳은 손을 흔들어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손톱이 2번씩이나 빠졌다. 친정아버지께서 가게 오셔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것으로 보시고는 "병희야! 너는 이것을 천직으로 알고 일하라"라고 말씀 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마음은 늘 즐거웠다. 그렇게 힘든 일이었지만 하나도 힘이 드는 줄 몰랐다. 고객에 감사했고, 이 음식을 먹고 탈이 났다거나 불만이 있는 사람은 한 번도 하나 없었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고객이 탈이 없기를 기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불러 가니, “병희야! 손을 잡고는 이제 그만하고 나와라. 더 있으면 죽는다고 했다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내 손은 거짓말 같이 다 낫었다. 미신은 믿지 않으나 아버지께서 내 아픈 손을 거둬 가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년 전 만두가게는 수원시에서 팔달문 상가지역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공중화장실을 짓게 되어 문을 닫았다. 그 후 옆에서 분식가게 하던 사람이 동업을 사정을 하여 4년 반 동업하고는 음식점 일을 그만 두었다.


만두집을 그만 두고 나서, 옆 가게에 갔을 때 신화만두 찾는 단골손님이 찾아 와 신화만두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 장사하기 어려울 지경이라고 했다.

 

24년간 음식점을 하면서 미장원 한번 가지 않았으며, 관광버스 한번 타 본적이 없다.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온 정성으로 만두가게 온 손님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자식은 남매를 두었는데, 자식은 나와 같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두 자녀를 대학까지 졸업시켰고, 아들은 캐나다 배낭여행을 보냈더니, 거기서 살겠다며 대학원을 다녔고 직장을 다니고 있다. 딸은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그간 남을 위하여 일을 했으니, 이제는 내 인생을 살아보자고 했다. 먼저 내 평생 못 배운 게 한이 되었으니 공부하자고 했다. 학습관에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중학교와 고등하교 과정 검정고시에 응시하여 1년 만에 모두 합격했다. 다시 2017년 명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하여 지금은 3학년 과정에 들어가 있다.

 

논어 옹야장 17편에 사람의 삶은 곧은 것이니 곧지 아니하고 사는 것은 요행으로 면해 하는 것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에 따라 행동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많이 듣게 된다. 조 여사는 장사하며 이()는 조금도 챙기지 않고 고객이 맛있게 먹는 가만 생각하며 곧게 살았다. 힘은 들었지만 저절로 행복과 돈이 따라 왔다. 사람이 하늘로 부터 곧은 것을 받는다. 곧은 것이란 하늘의 이치대로 사는 삶이다. 하늘의 이치에 따라 올곧은 마음으로 산 조여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조병희 여사이다.


2018년 2월 14일 오후 수원시평생학습관 뭐라도학교 8기동아리모임이다. 조 여사는 왼쪽 첫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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